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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Nov 29. 2020

식물과 동물이 정말 다를까?

랩 걸, 호프 자런

동물과 마찬가지로 식물도 생명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해서는 대부분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식물 또한 동물처럼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준비하고, 전략을 세우고, 여행을 하고 서로 관계를 맺는다 것을.


이 책은 호프 자런이 과학자로서 어떻게 성장해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과학자로서의 삶 그 자체이기도 하고, 식물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Lab Girl 이라는 제목이 그 모든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호프 자런에게 실험실은 일상이고 삶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이 모든 이야기는 실험실과 과학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과학은 정해진 것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그녀의 끈질긴 노력이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들이 좋다. 바라는 세상을 '살아내는' 이야기.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이야기는 살아낸 시간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팟캐스트 책읽아웃을 듣다가 김하나 작가가 '제가 요즘 아주 빠져있는 책'이라고 소개한 것을 듣고 동네 서점에 달려가 산 책이다. 400 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책을 쉬지 않고 읽었다. 나무와 과학으로 만든 세상에서 활활 타오르는 이 이야기에는 멈출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무언가에 힘껏 몸과 마음을 던지는 것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특히나 그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 꼭 안아주고 싶어진다.



책은 크게 보면 그녀의 일생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시간 순으로 쓰여 있지만, 과학과 나무와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섞여 있다. 처음에는 그 구성이 혼란스러웠지만, 읽다 보면 방대한 이야기를 짜임에 맞게 정리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 책에 실리지 않은 더 많은 이야기들을 짐작해보게 된다.


나무에 대한 사랑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식물에 대해 영원히 모른 채로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식물들은 꼼짝없이 흙에 갇혀서 눈이 오면 추위에 떨고, 비가 내리면 맞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식물들은 그렇게 무기력하지 않았다. 시간 개념과 전략이 우리와 달랐을 뿐이다. 나무는 긴 겨울을 나기 위해 세포 안의 수분을 이동시켜 얼지 않도록 대비하고, 추웠던 유년 시절의 날씨를 기억해 매년 겨울을 준비한다. 물이 없는 지역에서는 30미터나 뿌리를 뻗어 바위를 뚫고 기어이 물을 찾아낸다. 씨앗들은 발아할 때를 기다리며 안전한 껍질 안에서 기회를 엿본다. 그러다 적절한 타이밍에 빛을 보러 나오는데, 그 기다림은 몇십 년, 몇 백 년이 되기도 한다. 무성하게 자란 나무는 어느 순간 나무 가지를 스스로 포기하여 물에 떠내려가게 한다. 강의 하류에 도착한 나무 가지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상류 지역의 나무들과의 관계를 이어나간다.


눈 속에서 사는 식물들에게 겨울은 여행이다. 식물은 우리처럼 공간을 이동하면서 여행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식물은 장소를 이동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사건을 하나하나 경험하고 견뎌내면서 시간을 통한 여행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겨울은 특히 긴 여행이다. 나무들은 오지를 긴 시간 여행하는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조언과 똑같은 조언을 따른다. 짐을 단단히 싸라는 조언 말이다.


우리는 자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얼마나 큰 오해인지, 알게 되었다.


과학 / 과학자 / 실험 / 실험실


누구나 일을 시작할 때는 좋아 보여서 뛰어들지만 그 마음이 오래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일의 의미가 인생에서 축소되기도 하고, 겉에서 본 일과 그 실체가 달라서 실망하기도 한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중 한 가지 원인은 그 일의 판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지 못하고 일 안에 갇혀 버려서 이다. 단단하게 고착화된 기존 판의 주도자들이 요구하는 방식이 부당하거나 나와 맞지 않다고 느낄 때, 돌아서게 된다. 혁신과 발견, 기존 지식의 전복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과학계도 다르지 않다. 20년 전 호프 자런이 일을 막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자런의 과학적 성과와 자런의 성별을 일치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당신이? 이 논문을? 작고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은 이 여자가?" 결과적으로 자런이  모든 시선들에서 '독립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녀만의 과학 세계를 만들어나갈  있었다. 하지만, 결과만큼  과정이 아름다웠을 리가 없다. 실험실에서 밤을 새우고 며칠을 달려들어 연구하는 그녀의 모습은 자신을 향한 부정적인 기대를 뚫고 '말할 자리'를 얻어내기 위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손가락 일부가 없는 괴짜 동료 빌과 여성 과학자로서 설 자리를 얻기 힘든 자런은 그런 면에서 닮았다. 둘은 미친 듯이 과학과 실험에 스스로를 던졌다. 내동댕이 치듯 실험실에 던져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학을 세상에 말하기 위해 다른 교수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무료로 표본을 만들어주고,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해 50시간을 운전하며 학회에 참석했다. 기꺼이 자신만의 세상을 열어젖혔다기보다는 고속도로 통행을 금지당해 좁은 숲길을 헤매며 걸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과학과 실험에 대한 사랑은 그래서 더욱 처절했고, 절실했고, 위대했다.



대체 불가한 우정


호프 자런의 동료 빌은 혼자서 땅을 파며 토양과 식물을 관찰하던 괴짜 학부생이다. 자런은 빌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 늘 머리를 싸매고 연구비 지원 구멍을 찾는다. 별난 구석이 있지만 연구원으로서 유능한 빌이 교수가 되지 않고 자런 실험실의 연구원으로 남아 있다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교수인 자런은 종신 교수직을 얻어낼 수도 있지만 빌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그들은 매년 연구비로 전전긍긍인데도, 빌은 자런을 떠나지 않는다. 그들의 기괴한 모험담을 듣고 있자니,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괴짜들을 서로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감당할  있을까 싶어서다.


인생의 폭풍우가 지나가면 달라질까

첫 직장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대전으로 출장을 간 날 밤이었다. 각 지역을 돌며 전국의 영업사원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는 일을 했다. 영업 조직의 교육부서 신입사원인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사랑했다. 교육의 원칙적인 태도가 좋았고, 아름다운 비전이라는 명목으로 거짓말을 늘어놓는 일이 그 당시에는 사명처럼 느껴졌다. 다만 출장을 가면 모텔에서 잠을 자야 한다는 게 견딜 수 없었다. 회사에 연수원이 있기는 했지만 각 지역을 돌면서 영업사원들의 스케줄에 맞추어 교육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연수원없는 곳으로 가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남자 선배와 함께 모텔에 들어가서 각각 방을 하나씩 잡고, 파란 조명 아래에서 짐을 풀어놓는 일이 끔찍하게 여겨졌다. 그때 나는 알았다. 나는 좋아하는 일에 대한 사명보다 안락함이 더 중요한 사람이구나.  뒤로는 '어떤 일을 하는지'보다 '어떻게 하는지'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라면, 호프 자런은 나와는 정 반대의 사람이다. 돈을 아끼기 위해 남자 동료와 같은 모텔방을 잡고, 비행기를 탈 수 없어서 50시간을 운전해서 학회에 간다. 빌은 더하다. 집이 없어서 차에서 잠을 자고, 그마저도 어려워져서 학교의 버려진 방에서 잠을 잔다. 늘 먹는 음식은 세일할 때 대량으로 사둔 냉동 햄버거다. 자리를 잡지 못하던 시절 호프 자런과 빌은 그런 생활을 지속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유머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안락함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년이 흘러 둘은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다. 쾌적한 집에서 재정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학계에서도 상을 받았다. 인생의 폭풍우를 지나 보내고 맑게 갠 하늘을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일생을 폭풍우를 피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일에 대한 사명이나 좋아하는 일을 향한 열정보다는 '안정적인 생활'을 따라갈 것이다. 그런 나에게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이처럼 열심히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마치 세상에는 고생 총량의 법칙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제현주 작가의 책에서 '애호하는 세계는 겹겹의 우주'라는 표현을 보았다. 자런과 빌에게는 나무와 땅이 겹겹의 우주일 것이다. 내게는 뭘까,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낼수록 더 깊은 매력을 보여주는 세계가. 그 세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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