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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Oct 06. 2019

오늘의 내가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없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기술 발전이 다 사기라고요?


유발 하라리는 농업 혁명, 산업 혁명 등등 인류를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만 같았던 모든 혁명들이, 결국 사기라고 말했다. 인간은 더 혹독한 노동과 착취에 시달리게 되었다.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새로운 기술들이라고 다를까.


김초엽의 소설은 미래의 시간 속에서 시작한다. 그 미래에서는 우주 모든 곳을 여행할 수 있다. 우주 다른 곳에 정착해서 살기도 하고, 다른 행성 생명체와 조우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고 기술이 발전하고, 열심히 보낸 우리의 오늘들이 쌓이고 흘러, 미래에 도착했다. 그곳은 어떨까. 그곳에서 우리는, 지금 할 수 없는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래는 지금보다 나은 모습일까?


우리는 답을 안다. 과거도, 지금도, 미래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고독하고, 그럼에도 사랑하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다니면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산다. 오늘의 나, 어제의 나, 내일의 나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어차피 똑같다면, 왜 이렇게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고통받아야 하지? 사피엔스를 읽으며 했던 질문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과 다른 모습일 것이라 기대한 미래도 똑같다면 오늘의 나는 어디를 향해 가야 할까?


SF 소설의 매력


SF소설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현실적인 성격이라서 그런가. 소설이든 드라마든 현실적인 내용을 좋아한다. 김초엽의 소설을 읽게 된 건, 팟캐스트를 듣다가 '그냥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좋다'라는 추천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망원동으로 자리를 옮긴 '당인리책발전소'에 들렀다. 서가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이 책이 있었다.



서정적이고 예쁜 표지. 몽환적인 그림. 홀로그램으로 새겨진 책 제목.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책을 고르는 순간은 매번 충동적이다. 논리적인 판단으로 고르게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책을 읽는 것은 나에게 일이 아니니까. 즐거운 일들은 거의 충동적으로 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왜 SF소설을 읽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소설 속에서는,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다. 우리가 말도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꿈꾸는 것들,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상상들을 실현시켜 준다. 그런데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런 무한의 세계에서도 우린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에 상처 받고, 해야 하는 일들에 중압감을 느끼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해 슬퍼한다.


이 지점이 SF 소설을 읽는 이유 같다. 지금 나의 상황과 별로 다르지 않은 문제들을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 안 풀리는 문제를 붙잡고 있는 것보다, 가끔은 산책도 좀 하고, 친구도 좀 만나고, 맛있는 음식도 좀 먹으며 고민하는 게 낫다. 주변 분위기가 바뀌면 관점도 바뀌고, 어렵지 않게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


내일은 좀 더 나을 거라는 기대


다시 돌아가서, 기술의 발전이, 오늘의 노력이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 주지 못한다면, 오늘의 내가 한 무수한 노력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일은 좀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제의 나는, 오늘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을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오늘의 내가 어제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 하나로, 애쓰며 살아왔다.


농사를 지으면, 불안정하고 위험한 사냥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을 거다. 기차를 만들면, 먼 곳까지 쉽게 갈 수 있으니 힘들게 오가는 수고를 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물론 맞다. 우리는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 모든 것을 나의 몸으로 해결해야 하는 세상으로 돌아가 적응할 수 없을 것이다.



희미한 꿈을 꾸며 살 수밖에


그러니까, 설사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질 건 별로 없을지라도 내일은 다를 것이라는 꿈을 꾸고 살 수 밖에는 없는 일이다. 귀찮아도 꼬박꼬박 요가를 하고, 건강하게 밥을 차려 먹고, 늦지 않게 회사를 가서 9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생활을 견뎌내려면 말이다.


좋아하는 드라마, 'WWW'의 대사를 인용한다.

니 말이 맞아. 모두 끝이 있지. 근데 시작할 땐 적어도 영원할 것 같은 느낌이어야 시작이 되는 거 아닌가?


그냥 모르겠어, 지금이 좋으니까


그거면 될까? 그냥 어차피 하루하루 다 똑같은 거 알지만, 내일은 나아질 거라고 그렇게 믿고 살면 되는 걸까? WWW에서 타미와 모건은 헤어진다. 끝이 뭔지 아니까, 적어도 희망이나 기대, 꿈같은 게 있어야 하루하루가 이어지는데, 둘은 그게 안 된다는 걸 인정한다. 우리는? 우리도 어차피 마음속 한 구석에는 알고 있다. 이렇게 아등바등해 봐야, 내일이 그다지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을. 꿈을 꾸는 게, 희망을 갖는 게, 기대를 거는 게 의미가 있을까?


WWW 마지막 회에서, 타미와 모건은 다시 만나기로 한다. 여전히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내일이 돼도 매일 반복되는 문제로 힘들어질 거라는 걸 안다. 모건이 말한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그냥 좋으니까.


그 정도가 오늘 우리의 최선이 아닐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힘든데 억지로 요가를 다니는 건 아니다. 요가를 하는 동안 온전히 내 몸에 집중하는 게 좋다. 일상의 한 순간, 다른 세계에 들어가는 기분이다. 건강하게 매 끼를 직접 만들어 먹는 일도 즐겁다. 어려운 요리를 하는 게 아니라, 신선한 제철 재료로 간단히 조리해 먹는다. 좋은 재료에 간을 많이 할 필요는 없다. 베이킹도, 독서도 다 그냥 좋으니까 하는 일이다. 일은, 아...! 일이 좀 예외인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자금조달처라는 점에선, 크게 봐서 좋으니까 하는 일에 꾸역꾸역 넣어볼 만하다.


멋진 꿈을 가질 필요도, 헛된 기대를 가질 필요도 없이, 그냥 지금이 좋으니까 살 수 있다면 좋겠다. 하루 24시간 중에 일하는 9시간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나머지 시간들은 그 지루하고 씁쓸한 일터에서의 기억을 상쇄할 만큼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살고 있다.



오늘의 내가 더 나은 내일을 만들지 못할 수도 있다. 오늘의 나는 좋아하는 일과 싫어하는 일들을 적당히 섞어하며 지내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좋으니까 오늘도 그럭저럭 지내본다.



이미지 출처

표지 이미지: 예스 24

하단 인용 이미지: https://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thbksn&id=661


제목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저자 | 김초엽

출판사 | 허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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