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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Dec 09. 2020

말은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말이 칼이 될 때, 홍성수

언젠가부터 텔레비전을 보지 않게 되었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흔하게 나오는 외모 비하, 드라마의 대사 속 편견들을 마주하면 고요한 휴식 시간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이런 말을 들으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우리는 왜 타인을 저렇게까지 비난하고 적대시하는가. 무엇 때문에 어떠한 존재는 존재 자체로 평가받을 수 없는가. 다수를 위한 프로그램이 다수의 자극적인 관심을 유도하는 것에 지쳐서 나의 관심을 책으로 돌렸다. 그러나 책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릴 때 좋아했던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기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보다가 이내 덮어버렸다.  당시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작가의 습관적 표현들이 이제는 지뢰가 무성한 전쟁터에 발을 디딘 것처럼 아프게 다가왔다.


그 누구도 상처 주지 않는 글을 쓰는 작가들을 찾아다녔고, 나 또한 행동이 아닌 상태로 누군가를 평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쓰는 글은 일정 부분 모호해졌고, 누군가를 향한 답변은 말끝이 희미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모든 순간 정확할 수도 없고 정확할 필요도 없다. 찌르지 않기 위해 뭉툭해진 손톱을 손가락 안으로 움켜쥔 채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세상에는 존재해야 한다.


예상치 못하게 아주 유해한 말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줄곧 피하고 피해도 결국 마주하게 되는 막다른 골목에서, 궁금해졌다. 말이 칼이 될 때 그 칼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홍성수 교수의 [말이 칼이 될 때]는 혐오표현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기본서이다. 혐오표현이 무엇인지, 왜 문제인지, 사회는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 교양 수업의 교재처럼 정리가 되어있다. 주제도 가볍지 않고, 사례보다는 개념 위주의 설명이라서 참고 도서를 읽는 기분이었다. 읽는 속도는 더디었지만 쉬지 않고 읽었다.





책 내용 요약


혐오표현은 '표현의 자유'와 자주 부딪힌다. 자유가 제한되는 경우는 나의 자유가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이다.


혐오표현은 소수자를 대상으로 하는 차별과 관련이 있다. 차별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재생산된다. 다수를 향한 부정적인 비난과 혐오표현가 다른 것이 이 지점이다. 다수를 향한 부정적인 비난은 차별을 재생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혐오표현이라고 이슈화하기는 어렵다. 누군가 이성애자는 반사회적 존재라고 비난한다고 해서, 다수의 이성애자들이 차별받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혐오'표현이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써야 하냐는 비판도 있지만 혐오표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자체가 반 차별 운동의 전략이다.


차별은 폭력적인 행동을 유발한다. 이것은 실질적인 해악을 가져온다. 혐오표현 금지법이 별도로 필요한 이유이다. 차별은 소수자 집단 자체를 모욕한다. 집단 모욕은 전염성, 집단성 성격이 강하다. 혐오표현은 증오범죄로 연결되기도 한다. 증오범죄는 피해자 집단을 대상으로 경고하는 행위이고, 이것은 공포감을 가져온다. 이 때문에 증오범죄법 제정이 필요한 것이다.


혐오표현은 역사 부정 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역사 부정 발언을 두고 처벌해야 하는가 아닌가를 논의할 때, 해당 발언이 피해자를 차별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세계는 혐오표현을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을까? 혐오표현을 '표현' 단계에서 규제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 입장이 나뉜다.  두 가지 접근 방식이 있다. 혐오표현 규제를 찬성하는 [유럽식 접근]과 규제를 반대하는 미국식 접근이다. 미국만 예외인가 의문이 들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적 맥락과 특수성에서 비롯된 관점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참고) 20세기 초~중반, 정치적 반대파를 사회에서 추방했던 역사를 교훈 삼아 미국은 표현 자체에 국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원칙을 확립했다. 다인종, 다문화 사회가 하나의 국가로 유지되기 위해 최소주의적 방식에 합의했다고도 볼 수 있다. 표현의 자유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미국의 치료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혐오표현에 대해 국가가 어떠한 개입을 해야 하는가, 라는 논의는 논점을 이렇게 전환해볼 필요가 있다. 여러 규제 장치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는 개입도 필요하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에는 신중해야 한다. 표현이 자유란 본래 '소수자의 권리'이다.


표현의 자유를 '지원'하는 개입도 필요한데, 퀴어문화축제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사례를 들 수 있다. 표현의 자유를 '지원'함으로써 소수자의 실질적 평등을 지향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를 확대함으로써 혐오표현이 가지고 오는 사회적 해악을 막자는 주장은 '혐오표현 금지' 역시 해악이 있기 때문이다. 혐오표현을 금지하면, 사회적 담론이 이분화될 수 있으며,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적 에너지가 '처벌'에만 집중될 가능성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혐오표현을 금지하고 처벌하는 개입을 강조하는 의견은 처벌이 가진 상징적, 교육적 가치 때문이다. 국가가 소수자를 보호하고 지지한다는 의미를 사회적으로 공표할 수 있다.


혐오표현 문제에 대한 공적 인사의 발언은 큰 의미를 갖는다. 중립보다는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 혐오표현에 대한 분명한 사회적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혐오에 대항하는 운동들이 있다. 대항 표현이라고도 불리는 메갈리아의 미러링, 일본의 카운터 운동 등은 혐오표현을 코너로 몰고 고립시키는 효과가 있다. 철학자 버틀러는 메갈리아의 미러링을 언어철학적으로 정당화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대항 표현에 대한 '보복 행위'를 법과 제도가 규제해야 한다.




인상적인 문장과 코멘트


이런 상황에서 소수자들은 '침묵'을 선택하곤 한다. 웃는 척하면서 넘어가기도 하고, 다른 말로 화제를 돌리기도 한다. 이때 침묵은 자발적이라기보다는 강요된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런데 이러한 침묵이 지속되다 보면 점차 그런 차별적 언사들이 정당화되고 고착화된다.


얼마 전, 노동조합이 주최한 임단협 설명회에 참석했다. 대기업의 노동조합원이라는 나의 신분에 만족하려는 찰나, 의문이 들었다. 이 노동조합은 누구에 맞서 누구를 지키자는 거지? 소외된 사람들이 눈에 보였다. 옆자리 파견직 동료, 협력업체 담당자. 노동조합이란 기본적으로 소수자 집단이 다수의 차별로부터 권리를 지키려는 조직이다. 힘의 크기로 보면 직원 소수자 집단이고, 기업은 다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우리는 다수의 편에 서기도 한다.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관심이 없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측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무엇인가? 누구나 소외당하면 싸울 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럴 능력이 없으면 발언할 수 없는 것인가? 연봉을 올려주겠다는, 대출 한도를 늘려주겠다는 말들은 달콤하다. 그래서 아찔하다.


혐오표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만 그 규제에는 반대한다. "더 적은 표현이 아니라 더 많은 표현이 최고의 복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혐오표현 규제법을 만드는 대신 혐오 세력에 맞서 '함께 싸우자'라고 말한다. 그들을 시민사회의 힘으로 퇴출시키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시민사회의 상징이라고 주장한다.


홍성수 교수는 끊임없이 강조한다. 말하자고, 더 표현하고 끄집어내자고. 소수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우리는 더욱더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어떤 말들은 칼이 되지만, 어떤 말들은 힘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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