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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May 04. 2019

어디든 잘 어울리는 취나물

4월, 취나물쌈밥과 버무리

엄마는 요리 솜씨가 좋다. 미니멀리스트인 나와는 달리 맥시멀리스트이긴 하지만, 그래서 엄마의 요리는 정말 맛있다. 필요한 모든 재료가 다 들어간 완벽한 맛의 조화, 다양한 식감, 오랜 시간 공들여 조리한 요리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풍미. 엄마가 어릴 적 해주던 음식 중에 '호박잎 된장쌈밥'이 있다. 엄마 요리 특유의 맥시멀 한 매력과는 다른 '단순한 맛의 매력'이 느껴지는 메뉴다. 커다란 찜솥에 호박잎을 찐다. 접시 위에 호박잎을 높이 쌓는다. 그 옆에는 가득 담은 밥과 된장 종지가 있다. 밥과 된장, 그리고 호박잎.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맛이 난다.


그 생각이 나서, 호박잎 쌈밥을 만들어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는 동네 슈퍼에 호박잎을 많이 팔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요즘은 마트에서 호박잎을 보지 못했다. 이리저리 찾아다녀볼까 하다가, 호박잎 대신 취나물로 쌈밥을 만들어먹기로 했다. 마트에서 발견한 취나물은 호박잎보다는 잎의 크기가 작았다. 그중에 가장 잎이 큰 봉지를 집어 들었다.


호박잎 대신 취나물쌈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취나물은 잘 씻은 뒤 줄기 부분을 떼어낸다. (줄기는 잘게 다져서 쌈 속재료에 넣어도 좋다)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취나물을 데친다. 숨이 죽으면 건져내어 물기를 짜낸다. 조심스럽게 한 잎 한 잎 펴서 쌈 속재료를 넣고 말아 주면 된다. 쌈밥을 만들어 먹으려 했는데, 밥이 없어서 토마토 된장볶음을 넣었다. 만들어 놓고 보니 의외로 잘 어울리고, 취나물 잎이 작아서 오히려 밥을 넣는 것보다 모양이 예쁘게 나왔다.

취나물 쌈을 만들어 일렬로 쭉 세워놓으니 귀여웠다. 그 위에 백태 미소를 조금씩 얹어주었다. 남은 토마토 된장볶음과 아보카도 낫또 버무리와 함께 같이 먹었다. 나는 좋아하는 음식이 생기면 한동안 그것만 먹는다. 생각해보면 다른 것들도 그렇다. 한번 좋아하게 되면 꽤 오래 좋아하는 편이다.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네. 요즘은 낫또에 빠졌는데, 거의 매일 저녁 낫또를 먹는다. 낫또만으로는 배가 안 부르니, 이것저것 섞어서 버무려 먹는다.

가장 무난한 아보카도 + 낫또 조합

낫또 버무리로 시도해 본 재료로는 아보카도, 김치, 취나물, 쑥 정도가 있다. 낫또 스무디로도 만들어 먹을 수 있는데 두부나 두유를 베이스로, 딸기, 망고, 바나나, 블루베리 같은 과일을 같이 갈아먹는다. 과일을 같이 갈아먹으면 낫또 특유의 향이 부드럽게 줄어들고 과일향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낫또 입문자들에게 추천하는 낫또 먹는 법이기도 하다.

낫또 + 아보카도 + 사과 + 세발나물, 너무 많이 넣었나..


버무려 먹거나, 무쳐 먹는 음식들을 시도하다 보면 '이것도 넣어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머릿속으로 '나름 어울리겠는데?'라는 생각이 들면 일단 같이 넣고 요리해본다. 꽤 잘 어울리는 경우도 있고, 생각보다 안 어울리는 조합도 있다. 어울린다 아니다를 말하기에는 '그냥 얘는 얘, 쟤는 쟤구나' 싶을 때도 있다.


다양한 재료들을 섞어 보다 보면 '왜 얘랑 쟤를 같이 먹어볼 생각을 못 했을까?' 싶을 정도로 잘 어울릴 때가 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왜 꼭 이 재료랑 저 재료는 같이 먹어야 하고, 쟤랑 쟤는 따로 먹는 거지? 그런 법칙은 누가 정한 거야? 그냥 이렇게도 저렇게도 먹다가 맛있다는 생각이 들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그러다 보니 '이 조합이 맛있다'는 의견이 사실이 되고, 그러다 법칙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곧잘 그 법칙이 생겨난 과정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꼭 그래야만 해'라고 말한다. '원래 그렇게 해.' '다들 그래.'라는 말 앞에서는 딱히 내세울 논리가 없다.




회사에서 상무님과 저녁 회식을 했다. 상무님은 흔치 않게 직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는 임원이다. 뭐, 그렇다고 우리가 상무님의 모든 지시와 의견에 동조하는 것도 아니고, 상무님과 같이 밥 먹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상무님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싫지 않다'. 회식에서 상무님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은 '그래, 그럴 수 있지.'였다. 술을 마시기 전 고기를 먹을 때도, 술이 얼큰하게 취해 고개를 푹 수구리고 이야기를 할 때도, 상무님은 줄곧 '그래, 그럴 수 있지.'라고 대답했다.


사람들이 상무님을 꽤나 수용적인 태도로 대하는 이유가 그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무님은 '틀렸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결국 본인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끌고 가지만, 그래도 우리가 하는 말에 '그럴 수 있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이 우리를 안심시킨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래도 상무님 앞에서 내 생각을 이야기해 볼 수 있다는 안심. 저 사람이 내 얘기를 들어주고 있다는 안심. 알고 보면, 칭찬까지도 필요하지 않았던 거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생각보다 '그럴 수 있지'라는 마음을 먹기 쉽지 않다. 그 사람의 말을 들으며 자꾸 내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데! 나는 저런데! 이런 생각이 자꾸 올라와서, 말하는 사람의 상황에 온전히 들어가 생각하기가 어렵다. 다행히도 나만 그런 것은 아니라서, 심리학 책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꽤 자주 다룬다.


매력에 대한 책을 쓴 이케하라 마사코는 '명상'을 추천하기도 했다. 명상을 통해 집중력을 향상하면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사람의 입장에서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고. 얼마나 남 얘기 들어주는 게 어려우면, 세상에 명상까지 배워야 하다니.


건강 문제로 작년부터 명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의 영향이겠지만) 명상을 1년 동안 배웠지만, 여전히 순간순간에 집중하는 것은 어렵다. 아마도 평생 갈고닦아야 하는 문제일 것이다. '누군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때 온전히 그에게 집중해보자'라는 생각만으로도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여는 범위가 훨씬 넓어질 거라고 믿는다.


의도적으로 주문을 외워 보려고 한다. 누군가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할 때 속으로 '그래, 그럴 수 있지' 주문을 외운다. 그러면 아주 조금은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있다. 만약 지금 그 말을 들어주고 있는 나의 마음이 괜찮지 않다면, 내 마음부터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스무 살 래퍼 김하온이 하는 말을 들었다.


사랑이나 행복은 조금 있는데 나눠주는 게 아니고
자기한테 충분히 준 다음에 흘러야지
남한테 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스무 살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역시 깨달음은 나이와 무관하다. 마음의 깊이나 넓이는 나이와 무관하다. 배려에 대해 말하던 이케하라 마사코도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하고 타인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 또는 자신을 제쳐두고 상대의 희망을 이루어주는 것을 '배려'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여유가 없으면 타인을 배려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최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누군가를 위해서 친절한 말을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행동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 있지'의 주문을 나를 향해 외워 보라는 것이다. 회사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하는 나, 많은 돈을 벌지 못하는 나, 건강이 나빠진 나, 친구가 많지 않은 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의도와 달리 상처 주는 말을 한 나.


그래, 그럴 수 있지.

내일은 좀 더 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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