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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 미 Apr 19. 2016

웃기고 싶은데 슬픈 인생이야기

[서막] 남을 웃기는 노력 말고 내 안의 슬픔을 이겨내야지.

나는 매일 고민한다. '나'다운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쓸 수 있을까에 대하여 말이다.


이십 대 어느 즈음엔가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는  핑계로 여행사에서 일해보려 했다. 살고 있던 동네를 벗어나는 것이 어색했던  그때였지만 꾸역꾸역 한 시간 넘게 걸려 면접을 보러 갔다. 열심히 면접을 보고 좋은 인상을 남겼다고 여기고 돌아온 날, 나는 그 날의 기억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당시 유행했던 홈페이지를 통해 글을 남겼고 내용도 인물에 대한 묘사도 적나라했다. 나는 그랬다. 그것에 어떠한 악의도 없었으며 말로 내뱉었을 경우 부정적인 느낌일 수도 있지만 글은 정제된 상태로 나타나지니 솔직하면서도 담백하게 썼다고 여겼다. 며칠 뒤 면접을 봤던 인사 담당자에게 쪽지 한 통이 왔고 그 내용인 즉, 며칠 전 홈페이지에 남긴 내용에 대한 불편한 감정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엔 무척 황당하다고만 생각했고 글 삭제에 대한 요청에 의아했지만 그렇게 하겠노라 했다. 나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출근 날이 되어서 나는 출근하지 않았다. 새롭게 일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편견 혹은 나에 대한 선입견이 담당자에게 있을 테고 나는 그것을 굳이 극복해가면서까지 그곳에서 일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바람  불고, 차가운 바다 앞이어도 좋은 건 그걸 바라보는 내 눈이 아직 덜 때 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지난 이십 대 즈음의 글들은 미사여구도 나름 많았지만 결론은 늘 직설적이었고 지나치게 감성적이며 막무가내로 삐뚤어져 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삼십 대가 된 지금 왜 그런 글을 쓰지 못하는가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이십 대의 나는 많은 것을 찾아 헤매었고 무엇 하나 나의 가치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많았지만 정해진 것이 하나 없었고 그런 고민들이 괜한 상념과 말도 안 되는 개똥철학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나는 흔들리고 있었고 방황했으며 예측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의 글도 그러했다. 글을 쓰든가, 그림을 그리든가, 시를 쓰든가 해도 차갑거나 조금은 삐뚤어져 있으면서도 당시의 나의 감정들을 고스란히 남기기 위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의 나는 바로 그러했으니 말이다.


지금의 나는 다른가?

다르다면 그것이 그저 '나이'라는  숫자뿐이길 바란다. 여전히 조금은 삐딱하지만 그것이 바로 보기 위한 노력의 한 면이 되길 바라고 여전히 투덜거리지만 그 안에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길 바란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가 못하다. 생각 이상으로 뭉뚝해졌으며 싸우고 달려 드는 것에 대한 피곤함을 잘 안다.

싸움도 애정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무모한 싸움. 나의 애정이 굳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들로부터 눈과 귀,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놓인 현실로부터 도피를 꿈꾸거나 내 앞에 닥친 상황에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내 글에서 투박함이 빠졌다.

유려하지도 않고 공감을 주지도 못하면서 통쾌할 수 없는 시선.

나란 사람이 따뜻하게 글을 쓰다가도 내 안의 부정적인 짐승에게 먹이를 주며 글의 한 편을 내어주던 버릇 마저 지금은 그리운 것이 되어버렸다.


나는 웃기다. 슬프다. 혹은 싫다. 좋다. 로만 표현되는 인생 이야기를 쓰려고 마음 먹었다.

세상이 나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보아야 한다고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내 입장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상대의 입장만 되어보려 짓이다.

그만큼 어설픈 위로가 없고, 가식적인 이해가 없지 않은가?

한 번쯤은 내 길은 이거고, 내 생각은 이러하다를 이야기해 본 사람이라면 그 순간에 모든 사람들의 입장을 무시 아닌 무시로 일관하면서 나를 표현했던 것에 대한 희열이 있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도 나는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길 바란다면 그만한 역설이 없다.

내가 '누구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조금은 거칠고 투박한 때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하기로 했다. 씩씩해지기는 것이 그것 중 하나다.

외골수네, 남의 말은 듣지 않네, 자기 주장에 강하네 하는 것 따위에 맘 상하며 괜히 들어주는 척 공감하는 척 하는 것이 정답일 수 없겠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즐겁게 아자아자!! 화이팅!!!!!

자신이 경험한 것은 사실 누구도 대신 살아본 삶이 아니기 때문에 남에게 강요될 수 없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남은 삶을 살아가면 그만인 것이다. 굳이 남에게 펼쳐 보이지 않아도 될 일.

하지만 그건 너무 재미없다. 내가 사는 인생이 한 번이듯이 누구라도 두 번이 될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들춰보고 들여다보고  궁금해하는 것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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