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백록담을 가기 위한 한라산 등반
한라산은 고도 1,950m이며 오름에 있어 5가지 코스가 있다.
사화산, 휴화산이라고 하지만 언제 다시 지각변동으로 화산 활동이 일어난 지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로부터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한라산은 현재 한(漢)은 은하수(銀河水)를 뜻하며, 라(拏)는 맞당길 나[相牽引]혹은 잡을 나[捕]로서,
산이 높으므로 산정에 서면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높단 뜻이다. 우주의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다니 말이다.
아침부터, 아니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했다. 몇 가지 과일을 좀 챙기고, 뜨거운 물을 보온병에 담고 500ml 생수를 챙기고 점심거리를..... 전부 먹을 것만 잔뜩 챙겨 집을 나섰다.
예전 어리목 탐방로로 갔던 길은 완만했지만 미처 백록담을 볼 수 없단 사실을 저 멀리 보이는 남벽 분기점을 보고선 알았다.
한라산은 어리목, 돈내코, 영실 탐방로가 있는데 이 세 코스는 전부 윗세오름이라는 곳까지만 갈 수 있고 그곳에서 남벽분기점 안에 폭 들어가 있는 백록담을 볼 순 없는 코스다.
각각의 길이가 7km 미만인 완만하거나 테크 등으로 산책로처럼 잘 꾸며져 있다. 나는 이번에야 말로 꼭 흰 사슴이 물을 먹는 곳이라는 백록담을 보러 가야겠다고 다짐했기에 새벽부터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백록담을 볼 수 있는 성판악, 관음사 탐방로는 그 길이가 길고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경사가 오르락내리락, 돌길인 경우가 많으니 넉넉히 시간을 잡고 가야 백록담을 볼 수 있다.
백록담을 보러 가기 위해 꼭 챙겨야 할 것은 물, 등산화(무조건 편한 신발), 스틱, 먹거리, 현금이다. 물은 진달래밭 대피소(6km 이상 지점)까지 가야 살 수 있기 때문에 500ml 생수를 3-4개 정도 챙기는 것이 좋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육개장 라면을 사서 먹을 수 있고 1인 2개까지만 지급된다. 물론 뜨거운 물도 준다. 딱 거기에서 점심 먹으면 그 뒤부턴 1시간 30분가량 화장실도 없고 먹거리를 살 수 있는 곳도 없으니 잘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성판악에서 진달래밭 대피소까지는 성인 여자(기준은 나) 걸음으로 쉬는 시간 넉넉히 포함해 4시간 잡으면 충분하다.
여기까지 설명만 쓰는 데도 사실 벌써 숨이 차다. 내가 선택한 성판악은 말 그대로 악산이다. 자잘한 돌부터 큰 돌까지 해서 80프로 이상이 돌길이다. 정말 출발 전에 다리를 잘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되고 충분히 돌을 밟고 오르고 내릴 수 있는 밑창이 단단한 신발이 좋다. 이 모든 걸 무색하게 할 수 있는 건 사실 젊음과 체력인데 젊은 건 그렇다 치고 불어난 체중 덕에 나의 체력이 바닥인 것을 여실하게 느낄 수 있는 등반이었다.
조용히 아침 댓바람부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혼자 먹을 거라고 생각하기엔 생각보다 무거운 가방을 들쳐 메고 처음엔 천천히 다 떨어져 가는 단풍잎도 밟으며 상쾌한 아침 공기 속에서 시작했다. 날씨는 청명했고 단풍이 절정이라는 시기여서 그런지 형형색색의 등산객 일행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중년 산악회 모임, 커플, 가족 등
난 제치기보단 천천히 가고 있었으나 내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 하나 때문에 걸음을 재촉하는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스피커 소리.
동네 뒷산 다니는 마음으로 온 것이 아닌데 이 어디 약수터에서 들릴 법한 트로트 혹은 라디오, 혹은 축축 처지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음악. 자기 귀도 아닌 온 숲과 산에 울려 퍼지게 틀고 올라가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일부러 쉬면서 빨리 가게 하거나 내가 앞서 제쳐버리곤 했다.
아, 나는 정말 미세한 풀잎 소리, 도대체 뭘 먹은 건지 모르겠지만 독수리 뺨치게 큰 까마귀 소리, 바람결에 날려 떨어지는 낙엽소리를 들으며 가고 싶었단 말이다.
사소한 것에 귀 기울이게 되는 것이 숲이고 산의 매력이 아니던가 하면서 속으로 씩씩거리며 돌길을 밟아 올라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쳐가는 덕에 체력 좋을 때 예민하게 받아들이던 모든 것들이 잠잠해지면서 오로지 내 숨소리만 들렸다. 대체 진달래밭 대피소는 언제 나오는 거니?
한라산에서 백록담을 볼 수 있는 날씨도 있지만 등반하면서 볼 수 있는 시간도 한정적이라는 걸 알았다. 올라가는 내내 낮 12시까지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지 않으면 백록담을 볼 수 없으며 정상에서도 1시 30분에는 하산하도록 강조한다. 이유인즉 올라온 시간보다 내려가는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오르면서 서두르게 되고 진달래밭 대피소만을 찾게 된다. 나 역시 그 압박을 견뎌낼 수 없어 떨어지는 체력에 재촉하는 걸음으로 발 밑만 쳐다보고 오르고 올랐다.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했을 때 난 정상에 온 줄 알았다.
아. 3시간을 이렇게 걸어올라 왔구나.
정말 대피소구나 하면서 주변을 둘러본 순간, 내가 구름 위에 그것도 추운 겨울을 견뎌낼 숱한 나무들과 함께 있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다. 이제부터가 정말 고행일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딱 1시간 30분 남았다는 백록담까지 경사진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야 하기에......... 사람들은 줄을 서서 육개장이라고 쓰인 라면을 받아 들고 곳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 역시 한쪽 구석에 털썩 주저앉아 흠뻑 젖은 옷을 벗어 땀을 식히고 새벽부터 준비해 온 먹거리를 먹다가 백록담을 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보게 된다면 정신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 대강 입에 넣고 다시 길을 나섰다.
성판악 길은 길이 예쁘고 숲이 우거져 있지만 그 풍광을 쳐다보다간 발을 접질리기 십상이다. 돌길인 만큼 디딤을 잘 하지 않으면 올라가기도 전에 발목에 무리가 올 수밖에 없다. 진달래밭 대피소부터는 지체 없이 움직이면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 사이에 백록담이 있는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더 지치지 않기 위해선 사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의 과식은 금물이다.
천천히 계단을 하나씩 오르기 시작했다. 이 곳에 계단을 만들어 둔 사람들이 참으로 기이하게 느껴지면서도 낮은 계단 때문에 아픈 무릎은 더 시큰 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등반에서 늘 그렇듯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인 거다.
나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추측컨대 신혼부부 같은 커플은 같이 맞춰 입은 후드 티를 벗었다 입었다 하면서 걸어 올라가고 있었고 한참 전부터 몸의 한 쪽이 불편해 보이는 남편을, 아내는 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기다려 주기도 하고 독려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백록담을 볼 수 있다고
진달래밭 대피소 이후부터는 일행들은 서로를 독려하기 시작한다. 돌길 내내 마르지 않게 하던 수다도 모두 하나로 끝난다.
다 왔어. 다 왔어.
이런 날씨에 한라산, 백록담을 볼 수 있다는 건 거의 행운에 가깝다. 땡볕이 내리쬐는 한 여름이 아니고서야 단풍과 함께 아침나절 내내 하늘은 이렇게 높은 1900미터까지 올라와야 구름을 보여줄 정도였다. 주변을 둘러보며 갈 수밖에 없었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얼마 안 남은 고지까지 줄을 잡아 들고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중력에 이끌려 대체 몇 킬로그램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다리를 하나씩 올리고 또 올렸다. 좀 쉬면 괜찮아 올라갈 수 있었던 다리는 이제는 조금 쉬는 걸로는 회복이 되지 않았다. 아, 이렇게 저질 체력이 되었던가.
스프링이 달린 무릎 보호대까지 차고 올라가는 엄마 아버지 뻘 되는 어른들의 모습에 '그래도 그래도'라는 말을 되뇌게 하는 곳이었다.
그렇게 딱 몇 미터 남았다는 표지를 만났다. 해발 1900m.
높다. 시원하다. 파랗다. 눈으로 보이고 바람으로 느껴지는 한라산 정상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싶었다.
사람들이 빼곡히 올라선 정상에선 저마다 한라산과 백록담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난 무얼 해야 하지 라는 생각에 잠시 멍하니 하늘과 구름을 쳐다보고 있었다. 백록담을 봐야지.
흰 사슴이 물 마시는 곳. 그곳을 봐야지 하며 난간 쪽으로 다가갔다. 일주일 내내 맑았던 제주 날씨 덕에 물은 별로 없었지만 알고 보니 물이 가득 차도 그만큼 정도였다. 실망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제주는 건천이 대부분이고 습지가 형성된 곳은 보호할 정도이니 그럴 법도 하다 라고 생각했다. 대신 어쩜 이렇게 푹 패었을까 라는 생각에 꽂혔다. 예로 사냥꾼이 화살을 잘못 겨냥해 노한 신이 한라산 꼭대기를 집어던져 버렸다는 전설도 있다. 때문에 두무악, 두모악(머리 없는 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오래된 신선이 머물렀다는 산에 쌓인 전설과 이야기가 한두 가지겠냐만은
정조 연간에 간행된 읍지에 의하면, 한라산을 등산하는 데는 대정현 쪽으로 험한 산길이 하나 있어서 사람들이 이를 따라 수목 사이를 헤치며 올라가는데, 위에서 소란을 피우면 곧 운무가 사방을 덮어버려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고 하는 내용을 몸소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맑고 파란 하늘 가운데 움푹 파인 백록담을 눈에 담고 몇 장 찍어 담아둔 다음 한쪽에 자리 잡고 앉아 라면도 먹고 유부초밥도 먹으면서 실로 믿기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오후 1시경쯤 하산하라는 방송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더욱 많아지기 시작했고 점점 방송의 횟수도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때쯤 빠르게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면서 어느새 정상과 백록담이 전혀 보이지 않게 뒤덮어 버렸고 맑고 파란 하늘은 온 데 간데없었다. 소란스러웠나 보다. 나는 이 신선산에서 일어나는 일에 눈이 휘둥그레 지면서 이렇게 구름이 떼로 주변을 하얗게 덮어버리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혼자 구전동화를 쓰듯 이런 이런이런,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한 편의 동화 속 어딘가에 와 있는 듯했다. 조용히 했어야지. 내려가랄 때 내려가야지. 하면서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나의 동선은 성판악 휴게소에 차량을 주차해놓은 터라 성판악-성판악 일 수밖에 없었다. 왔던 길을 돌아 내려가는 내내 하늘은 심하게 어두워졌고 추위가 밀려왔다. 내려가는 길에 어렵게 줄을 붙잡고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쩌지 싶을 정도였다. 백록담을 보고 내려오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자주 듣는 말은.
" 내려가는 게 더 힘들어, 내려가는 게 더 위험해, 조심해야 한다."였다.
아니나 다를까 한 방향으로 올리기만 하던 다리가 힘이 풀려 털썩 털썩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시큰거리는 무릎과 욱신거리는 허리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상 안내 방송에서도 내려가는 시간이 족히 1-2시간은 더 걸리니 얼른 내려가라는 방송까지. 두려웠다. 과연 난 혼자, 이 곳을 잘 내려갈 수 있을까.
등산 스틱이 필요하단 건 내려가기 위함이 크다. 관절마다 뚝뚝 끊기는 기분을 도구를 이용해서라도 지탱해 가야 하기 때문이다. 내려가는 내내 날이 축축해지면서 곧 비가 올 듯 안개와 구름이 산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부터가 새로운 도전이겠다 싶었다. 잠시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쉬고 천천히 쉬엄쉬엄 내려가야지 다짐하며 움직였다.
내려가는 길에 일행들보다 뒤처져 천천히 스틱으로 한 땀 한 땀 내려가던 보라색 가방을 멘 여자 친구가 다리를 헛 디디는 바람에 넘어졌다. 앞에 있던 아저씨가 간신히 옷을 붙잡는 바람에 더 미끄러지진 않았지만 그녀는 풀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을 만큼 한 바퀴 반을 돈 상태였다. 나는 너무 놀라 멈춰 섰고 뒤 따라 내려오던 일행이 많았으며 길은 좁아 다들 멈춰 섰다. 하나둘씩 괜찮냐고 물어보며 지나가던 차에 사람들이 밀려 있으니 한쪽으로 내려와 앉아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어려운 듯 말을 던진 아주머니를 난 빤히 쳐다봤다.
나였다면 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행여 일행도 없는 나는 과연 저 서러움을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 하면서 용기 내어 말을 건네진 못했지만 성판악 휴게소까지 내려오는 길에 일행을 만나 차분히 내려온 그녀를 만날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렇게 높은 산을 혼자 등반해 본 것은 인생 처음이다. 산을 무서워하기도 하고 굳이 혼자가 아니길 바랐던 마음도 있었다.
올라오면서 봤던 진달래밭 대피소까지는 몇 키로가 남았다는 표지판은 내려가는 길에 더 야속하리만큼 줄어듬이 없이 자주 보였다. 아, 아직 1km도 못 내려왔구나. 이렇게 내려가는 게 더 힘들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이다. 어떻게 이 길을 올라왔지 라는 예전 등반의 기억보다 지금 이 순간 여길 어떻게 잘 내려가지가 관건이었다.
털썩 주저앉아 쉬기 일쑤였다. 덕분에 물안개가 자욱한 한라산 숲길의 신비스럽고 오묘함을 잔뜩 느낄 수 있었지만 곧 울 지경이었다.
'내가 이렇게 지치고 힘든 몸을 가지고 무리한 일정을 한 거구나. 그래도 괜찮다.'
내려오는 길이니까 다치지 말자를 수도 없이 다짐했다. 내려오는 속도는 저마다 달라 내 주변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가도 단 한 명도 없이 한참을 내려오기도 했다. 3-4km 지점부터는 비가 추적추적 오기 시작했고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평소라면 두렵거나 무서워했을 상황인데 아무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 또 나처럼 혼자 혹은 여럿이라도 내려오고 있겠지라는 믿음인가?
간신히 성판악 입구까지 내려왔을 때 정신을 더 아득하게 만든 것은 자욱하게 낀 안개 길을 따라 차를 몰아야 하는 일이었다. 구비구비 굽어진 산길을 따라 집까지 가는 것이 더 두려운 나머지 우여곡절 끝에 다 내려왔음을 인지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화장실도 가고 음료도 마시고 탐방 사무실 안에 들어가 한라산 등반 인증서(현금 천 원)까지 발급받았다. 그리고도 차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먹다 남은 샐러드를 우걱우걱 입에 넣고 오후 5시가 훌쩍 넘은 시간,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다행이었다. 백록담을 볼 수 있어서, 전설 같은 이야기를 직접 느끼서. 그리고 무사히 오르고, 무사히 내려와서.
비록 3-4일 평지에서 제대로 걸을 수 없었을지라도.
더 이상의 인생에서 두 번은 백록담을 보지 않기로 다짐했어도.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