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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 미 Nov 21. 2016

시(詩)가 필요한 때

시간이 흘러가게 만은 둘 수 없어 외우기를 시작한다

언젠가 시를 매일같이 외우고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다. 언제나처럼 마음먹고 한 시를 외우고 그리고 그렇게 끝났다.

돌이켜 봤을 때 참 헛웃음이 나오는 일이지만  새삼 지금이 가장 시(詩)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다.

우울한 날들이 계속되고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위기가 도처에 깔려 있는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시가 무엇일까

책을 뒤지고 뒤진다.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를 외우기 위해 쓰고 쓰면서 내가 왜 이 시를 선택했던가를 보면

그때의 나는 자존감도 낮고 내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도저히 나 스스로에 대한 신뢰, 확신, 믿음 따위가 없던 때였다.

사람들이 내게 전해주는 응원과 위로가 통 먹히질 않고 나에게 넌 대체 뭘 하고 있니 라고 되묻기만 했던 때.

그때 나는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이 구절에 꽂혀 있었다. 내가 가는 길에 앞서 있는 누군가를 질투하기 바쁘고 나 보다 잘 지낸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질투하고

누군가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음을 잊고 보이는 결과만을 가지고 시기하기 바빴던 시간.


나는 생각해본다.

그때 그 시를 외우며 받았던 묘한 위로를 바탕으로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리고 사실 꼭 달라져야만 했던 것인가.


무언가 노력하고 극복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것도 있지만 때론 많은 것들이 그러함이 없이 시간에 흘러 무뎌지고 건너뛰어지기도 한다.

그런 시간이었다. 지금의 내가 무엇이 달라졌다고 하기보다는 그때만큼 괴로워하는 마음이 없고 길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도저히 시간에 이끌려 무뎌지고 건너뛰어지게 둘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지금은 위기이면서 동시에 시간이 흐르면 무뎌지고 건너뛰어질 수 없는 것들이 도처에 깔려 있는 상황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하는 말은 참 명료하다. 기회를 잡아야 위기가 극복되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흘러 달라지겠지라는 것이 먹힐 수 없는 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나짐 히크메트

내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당신이 만약 촛불을 켜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약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 어두움을 어떻게 밝힐 수 있는가?


찬란
이병률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하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하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파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더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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