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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 미 Nov 29. 2016

점을 믿으세요?

내 인생의 샤머니즘

#1

할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어렴풋이 남은 어린 날의 기억. 생전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어떤 아주머니가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거실에 있었다.

그녀는 무당이었다. 우리 가족을 전부 두 줄, 일렬로 앉혀 놓고 머리 위로 큰 칼을 휙 돌리기도 하고 곡성에 나오는 무당처럼 뛰며 이상한 노래도 불렀다. 그리곤 전혀 담배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는 고모할머니가 담배를 한 대 물고 피우면서 나와 내 동생을 불렀고 나에게 약과, 한과를 집어 주었다. 내 동생에겐 각하라고 불렀다. 고모할머니가 그 당시 내가 약과, 한과를 좋아하는 것도 할아버지가 동생을 각하라고 불렀던 사실을 알리 없었다. 무서웠고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녀의 말론 새가 되었다고 했고 훨훨 날아가실 수 있게 했다고 했다. 우리를 보호해주실 거라고 했다.


#2

사진을 하기 시작하면서 운 좋게도 알게 된 감독과 친구를 따라 촬영 스텝으로 강화도에 간 적이 있다.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안 된 스물 세 살 정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2박 3일의 행사 중 낮에 벌어지는 행사를 중심으로 촬영하는 일정으로 1박 2일 강화도에 합숙했다.

만신 김금화의 60주년.

만신 김금화 선생을 어머니라 부르는 전국의 무당들이 그 자리에 왔고 낮에는 그들이 돌아가며 굿을 보여주는 행사였다. 강화도에 위치한 금화당 돌계단 아래 마당에서 진행된 행사는 각기 다른 신들을 모시는 무당들의 굿이 하루 종일 벌어졌고 나는 그들을 가까이서 찍어야 하는 사진 스텝 중 하나였다.

굿을 하기 시작한 무당은 신이 영접되는 순간 멈출 수 없는 굿을 했고 행사는 행사로만 끝나지 않고 돌발상황이 많았으며 그, 그녀들 중 누군가가 돌계단을 조심하라는 말을 한 그 밤, 금화당에는 구급차가 도착했다. 누군가 정말 그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것.

그, 그녀들과 한 집에서 자야 했던 나는 그 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어 함께 친구, 감독님과 탈출했다.

다음 날의 촬영도 있으니 멀리 도망갈 순 없었고 그저 포구 앞에 가서 술을 마시는 정도였다. 그렇게 취해서라도 자야 했다.

#3

스물 세 살 이후로 사주카페에 가서 만원 정도 내고 보는 사주풀이를 간혹 본 적이 있다.

그날 행사에서 점을 봐준다던 많은 무속인들은 각자의 일정에 바빴고 그래도 봐달라고 조르기엔 나에게 두려움이 더 컸다.


#4

아빠가 사업을 시작하던 어느 날, 엄마는 용하다는 스님을 찾아가 처음으로 우리 집 식구들의 사주를 내밀었다.

돌아온 엄마는 너는 천운을 타고났대. '뭘 하라고 해서 하는 애도 아니니까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더라.'

속으로 생각했다. '저보다 더 좋은 사주가 또 있을까.'그때의 나는 남들보다 대학도 더 다녀 간신히 졸업한 백수였을 때다. 취준생.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으로 정점을 찍던 뒤늦은 사춘기를 겪고 있던 때. 더 없이 좋은 말이었다. 그저 내버려두면 된다는 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만났던 무속인에 대해 사촌동생은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내 동생과 자신의 미래를 점쳐주었다는 것이다. 나에겐 전혀 기억이 없는데 녀석은 그 부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돌계단에서 누가 굴러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셨고 누구라도 그리 될 수밖에 없을 만큼 돌계단과 계단 사이는 한걸음으로 오르지 못할 만큼 높았다.

사주카페에서 봤던 사주는 사실 스물다섯 전에 보는 것이 의미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다.

스물다섯 이후에나 사주가 정확하게 나온다는 뜻인가?


나이가 들수록 더 깜깜해 보이는 미래 때문에 더러 인터넷이나 모바일을 통한 사주풀이, 운세풀이를 예전보단 더 자주 들여다본다. 때로는 너무 소름 끼치게 맞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조심하라는 건 조심하게 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5

최근 처음으로 주역, 사주풀이도 하며 영을 받으신 분이 계시다는 철학관에 갔다. 대기실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앉아계셨고 빼곡히 한자가 적힌 종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자신의 생년월일, 가족의 생년월일 생시 등이거나 어제 갓 태어난 아이의 작명 등을 보러 오신 분들이었다. 번뜩 주변에 어르신들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우리 일행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이쿠. 이 곳에 이렇게 앉아 있어도 되는 걸까 싶은 마음.

오전부터 길을 나서서 찾아온 곳이지만 대기시간만 1시간이 족히 넘어섰다. 이미 저 멀리서 더 일찍 오신 어르신들의 순서가 다 지나고서야 우리 일행은 그분을 만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매 맞는 표정으로 마주 앉은 나는 사실 딱히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기보다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입에 풀칠하며 살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딱 그거 하나였는데... 무언가 탈탈 털렸다.

과거를 이야기하시는 분이 아니었다. 단호한 말투였고 사주가 적힌 종이를 보고선 한편에 내려놓고 담배를 물곤 넌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는 경륜과 영, 주역 풀이까지 다 끝난 듯한 말투.

여하튼 나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다. 혹여 그 길이 아니라고 하면 어쩔까 하는 두려움이 컸지만 왠지 그런 마음이라도 읽은 듯 스스로가 하고 싶어 하는 걸 하면 된다고 하셨다. 그렇게 올해를 마무리하는 나는 괜히 마음의 짐을 덜은 듯했다.


힘들고 어려운 마음이 들고 내 앞날이 깜깜하다고 느끼던 때가 이번만은 아니다.

십 대에는 대학, 입시, 꿈, 장래희망 등 때문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 수 있을지, 공부도 별로 외모도 별로 뭐 하나 뚜렷한 것이 없는 그때의 나는 십 대 내내 깜깜하다고 생각했었다.

이십 대의 나는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늘 공허했고 사람들과 시시콜콜 어울리고 큰 소리로 웃어도 외로움을 느끼며 뒤늦은 질풍노도의 시기처럼 지냈다. 때론 한참을 아스팔트 위를 헤맸고 어떤 때는 나는 내 삶을 잘 살고 있다고 다독여 가며 어느 날엔 미친 듯이 술을 퍼 마셨다. 그만큼 뭘 해서 먹고살지, 깜깜했다.

삼십 대가 된 지금의 나는 아직도 꿈을 향해 가고 있는 이 어리석음의 끝이 어딘지 몰라 깜깜하다.


인생이란 늘 이렇게 깜깜한 길을 걸어가고 때론 뛰어가고 엎어져 가며 지나가는 거.

그래서 누군가에게 나의 이 모든 시절들을 설명하지 않아도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상관없이 정해져 있다고 하는 운명, 기질을 두고 툭 끊어 이야기를 들어보는 그 순간. 꽤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무조건적인 믿음은 아니지만 어떨 때는, 요즘 같은 때는 점을 믿어보게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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