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조각

그 순간의 기록들(1)

by 진미

제주 여행을 할 때 우연히 들렀던 카페에서 폴 서루의 <여행자의 책>을 봤다. 그가 여행을 다니면서 썼던 글들과 함께 여행자들을 위한 책이면서도 그의 여행 예찬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책이었다. 두껍고 무거웠던 책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그 안에서 나는 아래와 같은 구절을 기록했었다.


최고의 여행을 위해서는 단절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있는 곳에 집중하라.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하지 마라. 어떤 일거리도 떠맡지 마라. 연락 두절의 상태로 있어라. 떨어져 있어라.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당신과 어떻게 접촉할 수 있는지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당신이 지금 있는 곳만을 생각하라. 이것이 여행의 이론다. _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기차 중


지금 나는 그의 글과는 달리, 유럽 여행 당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곳(숙소 혹은 카페)에서 SNS를 통해 남겼던 짧은 기록들이 일상을 살고 있는 나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고 있어 무조건적인 단절을 권하진 않는다. 의문이 있을 거다. 노트에 남기면 되지, 굳이 SNS를 통해 사람들에게 공개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 부분에 있어 '검열'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다. 자신의 노트에 글을 쓰는 일기와 같은 행위는 대부분 검열이 없다. 누군가 볼 것도 아니니 문장은 늘어지고-전적으로 나의 경우에-시간에 따른 행위를 남기는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일기 쓰는 법을 그렇게 배웠다.

또 전적으로 나의 경우 남들에게 공개되는 글에 명료하게 찰나를 남기는 것이 현재 여행에서 돌아온 나에게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문장들로 남아있다. 공개, 전달한다는 것이 주는 검열은 이렇듯 때론 선명하다.

다시 들여다본 기록들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뒤죽박죽이지만.......

(검열이라고 하기엔 창피할 만큼 일기 같은 이야기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며....)



2014년 7월 11일 두브로브니크_크로아티아


길에서 자꾸 지나간 나를 만난다.

당신에게 사랑한다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마음에 걸리게 하는 풍경이다.


2014년 7월 12일


여행을 하면서 '보고 싶었던 사람이 있던 때가 있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의 여행은 이미 잊혔고 그때의 감정도 지금은 사그라들었다. 지금 내가 하는 여행의 중간쯤. '왜 여기 있나' 보다는 '누구와 여기 있고 싶다'는 감정뿐인데... 과연 이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까.

휴양지의 밤은 길고 끊임없는 웃음소리 가운데 나는 손가락으로 친구가 남겨준 컵라면을 먹었다. 지지직 잡음이 심한 텔레비전의 낯선 소리 가운데 체할 것 같은 라면이 왠지 서글프다. 누군가는 무작정 길을 나선 나를 부러워한다지만 장기간 낯선 곳의 여행은 황홀한 풍경을 선사해도 때론 졸음이 온다. 5시간의 버스 이동 동안 목이 꺾일 정도로 잠이 잘 오는 건 피곤함일까 지루함일까.

혼자 여행은 잡념이 많아진다. 너무나도 거대하게 본 적 없던 자연 앞에선 무상이 되었다가 사람들의 북적임을 들으면 이내 잡념으로 가득해진다.

여행의 중간, 이제는 마무리로 가는 오늘 밤... 시원한 바닷바람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저히 그 야경에 집중되지 않는 밤을 보낸다. 이미 버스에서 너무 자서 잠을 못 이루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프루스트가 여행은 새로운 시각을 찾는 거라 말했다는데 나는 어떤 시각을 찾았을까. 숱한 풍경들은 카메라에 있고 잡념은 때론 버려졌고 그리움은 알림 없이 나타는데.

무엇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찾는단 말인가.

이러다가도 내일은 또 드넓은 바다와 풍경 앞에서 소리치겠지. "여기구나!"


2014년 7월 14일 프라하_체코


크로아티에서 프라하까지 1시간 비행으로 왔다. 프라하에서 치스키까지 버스로 3시간이란다. 왜 이리 멀어라고 생가하다가 피식 웃었다. 두브로에서 토르기르까진 버스로 5시간 반이나 걸렸는데....

체코는 그래도 크로아티아보다 교통편이 낫지 않을까 아니 더 빠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불쑥 이렇게 삶의 모습이 나온다. 무조건 제일 빠른 것만을 원하던 도시에서 온 탓인가. 나름 느리게 걷는다고 여기던 나도 어차피 그 도시 서울에서 온 사람이다. 아, 이런 게 여행에서 내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고 마주 대하게 되는 나의 지난 삶의 방식들이구나.


2014년 7월 18일 하이델베르크_독일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의 철학자의 길을 걷는다. 누가 내게 걸으라고 한 적 없지만 걷는다.

든든히 먹고 걷자는 심보로 잔뜩 배불리고 오르니 무척 힘들다. 덥고 땀은 비 오듯 흐르고 계단은 많고..... 힘들다 하면서도 올라와서 그늘 진 벤치에 낮아 쉬니 다시 걸을 수 있더라.

힘들어도 오길 잘했다.

이번 내 여행이 배부르고 따뜻하게 잔 나름 호화스러운 여행이었지만 오길 잘했다. 하루에 6시간씩 걸어도 결국 오늘처럼 그늘 진 벤치에서 단 몇 분의 휴식이 또 걷게 만들더라.

지난 시간 동안 후회도 미련도 많지만 여튼 잘 걸어왔다. 이렇게 잠시 쉴 짬을 가지니 뭐든 그래도 잘 해왔다며 날 다독이게 된다.



2014년 7월 20일 브뤼셀_벨기에


이제 끝나간다. '새로이 시작이다.'라고 스스로 위로할 뿐.

여행을 돌이켜 볼 때 돌아갈 곳이 주는 안도감과 돌아갈 곳이 없어 느끼는 자유를 고민하게 하는 밤이다. 바젤에서 만난 스님이 내게 던졌던 그 말이 자꾸 떠오른다.



2014년 7월 21일 브뤼셀에서 런던으로 가는 유로스타.


브뤼셀(벨기에)에서 마지막 여행지 런던으로 간다. 18시 56분 유로스타.

천천히 도시를 보고 밥도 먹고 코인락커 짐을 찾아 유로스타 체크인을 하러 갔는데, 역 밖으로 줄이 길게 서 있었다. 한참을 그 줄에 서 있다 보니 17시 56분 기차가 취소되는 바람에 탑승객 전원이 줄을 서 다음 기차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새로운 차가 배차되지도 않고 1시간 넘게 기다려서 결국 올라탄 게 다음 열차인 19시 52분 열차.

티켓을 보여주고 안내받은 객차로 가면서 '아.. 하나씩 밀려 타는구나. 역시 유럽이야.' 하는데

내 자리 티켓을 가진 해당 시간 대의 사람이 나타났다. 복도 측에 앉은 여자애도 일어났고 나보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그렇지.

결국 막차 어렵게 얻어 타고 문 앞 보조의자에 앉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왼쪽 문 앞에 앉은 아저씨도 나와 같은 신세. 90유로짜리 문 앞자리라니.

아저씨는 아주 판타스틱하다며 이 자리도 좋다 한다. "그래요. 나도 뭐 그렇게 생각해볼게요. 의자라도 있는 게 어디입니까. 창도 있고, 에어컨도 나오네요."


런던이 나를 격하게 반기는 구나.




두서 없는 기록일 수 있지만 지금 이 기록을 펼쳐 본 나는 잊고 있었던 여행에서의 몇 장면이 손쉽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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