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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의애나 Apr 20. 2018

호주 차일드케어 교사들의 아이들 사고 대처 방식

유치원에 간 당신의 아이가 이가 깨져서 돌아온다면.

이주간의 휴가를 마치고 호주로 돌아와 이번 주부터 다시 유치원으로 출근했다.


변함없는 아이들, 잘 울고 잘 웃고 잘 자고 잘 싸고.

기쁨도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지만은 않은 게 차일드케어 일이다. 소락대기를 질러가며 울어재끼는 어린 아기들 사이에서 몇 시간을 보낸 뒤 (영혼은 빼낸 껍데기뿐인 육체를 일으켜) 잠시 한시름을 놓았을 때 그제야 다른 선생님과 대화를 할 기회가 생겼다.


우리 반 담임인 이 선생님은 나에게 전화기와 학부모 전화번호 명단을 넘겨주며,

"아까 R이 놀다가 넘어졌는데 에이프레임(철봉?)에 이를 박아서 앞니 코너가 깨졌어. 얘 엄마한테 전화해야 했어서 이거 가져왔는데 제 자리에 좀 놔주라."

라고 했다.



헉, 이가 깨져?



진짜 속으로 헉소리가 났고 겁이 나서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리곤 물었다.


"R은 괜찮아?"


때마침 다가오는 그 아이, 환하게 웃으며 ‘아나아나’(내 이름) 불러댔다. 아~ 해보라고 해서 앞니를 살펴보니 정말 코너가 깨져있었다.


선생님은

"넘어지면서 이를 부딪혔을 때는 좀 울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괜찮아졌어. 다른 데는 다친 곳이 없었고 딱히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일단 엄마한테 알리기만 했어."

라고 대답했다.


애가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었지만 아찔했다.

과연 이 아이의 엄마는 이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뭐라 했을까? 내 애였으면 이 전화를 받고 어떤 심정이 들었을까? 화냈을까? 와서 데려간다고 했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리고 나는 선생님에게 물었다.

“애 엄마는 얘기 듣고 뭐라고 했어? 화난 거 같았어?”


"화가 난 것 같지도, 놀란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되게 차분했어. 그리고 전화해서 알려줘서 고맙대."



그 날 오후, 사고를 목격한 담임 선생님이 사고 레포트를 작성하고 내가 R을 데리러 온 아빠와 대화를 했다.

아이 엄마에게 이야기 들었냐, 이런 일이 있었는데 애는 괜찮다. 이를 한 번 확인해봐라. 철봉을 잡으려다가 발을 헛디뎌서 이를 박았다.


초등학생 때 영구치 앞니 하나가 부러진 경험이 있는 나이기에, 이가 부러진다는 것에 약간 트라우마가 있는 지라 다른 사고들보다 좀 무게감이 있었는데 너무 쿨한 이 아빠의 반응.


"어떻게 다른 데는 하나도 안 다치고 이만 깨졌지? 너 또 막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넘어졌구나!"






걸음마를 막 떼었거나, 아직도 걷다가 휘청휘청 거리거나, 십 분에 한 번씩 엉덩방아를 찧어대는 1살에서 2살 사이의 아이들에겐 넘어져 다치는 일은 일상이다.


사실 어제의 사고도 빈번한 일 중 하나인데, 몇 달 전에 다른 아이에게 똑같은 사고가 났었다. 하지만 어제의 사고와 달랐던 점은 아이가 철봉에 잇몸을 찧어 피가 철철 났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뿔싸. 타이밍 좋게도 피를 흘리며 울고 있는 아이를 들쳐 안았을 때 그 아이의 아빠가 도착했다. 아이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울고 있는 걸 보자 그는 패닉이 되었다.


응급처치를 마치고 사고 레포트에 아이의 아빠의 싸인을 받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렇게 아이를 돌려보냈다.


차분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응급처치를 하고 부모에게 상황을 전달했지만 내가 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사과.


당신이 일하는 직장에서 아이가 다쳤는데 왜 부모에게 사과를 하지 않죠? 아이를 돌보는 일이 당신 일 아닌가요?라고 생각이 드는 사람이 많으려나. 하지만 아이가 다친 건 나의 잘못이 아니다. 


아이가 다쳐서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다친 아이의 부모에게 사과를 해야 할 만한 잘못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나의 일은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며 즐겁게 배우고 바르게 성장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말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으로 한시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들 곁에 서서 사고를 막아주는 버블랩(뽁뽁이?)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다수의 호주 교사들은 실수에서 배우는, 위험 속에서 안전을 배우는 리스크 테이킹(risk taking)을 중요시한다.


또한 일하면서 배운 실무 지식 중에 하나가 아이들의 사고를 부모에게 전달할 때에는 주관적인 생각과 감정을 쏙 뺀 채 객관적인 상황만을 전달해야 된다는 점이었다.  교사가 자신의 안타까운 감정을 조금 더 실어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순간 부모들의 원망의 화살은 쉽게 교사들에게 날아오게 되어있다.






하루는 나의 유치원 이야기를 들은 한국에 있는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그렇게 애가 다치면 걔네 엄마 아빠는 너네한테 뭐라고 안 하니?"


“응, 안 해.”


“정말 대단하다. 한국이었으면 내 애 왜 제대로 보살피지 않았냐고 길길이 뛸 텐데.”


“아니 근데 내가 애를 밀어서 넘어진 것도 아니고, 내가 애를 안 보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잘 걷다가 넘어진 건데 선생 탓을 하면 어떡해?”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자기 애 다친 것에만 초점을 맞춰서 선생들을 잡아먹으려고 길길이 날뛰지. 자기 애 제대로 안 보고 뭐했냐고~~”


모든 한국 부모들이 이렇다고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이게 뼛속까지 한국인인 우리 엄마가 생각하는 한국인의 모습인가 보다 싶었다. 


이때까지 수많은 사고들이 일어났었고, 그때마다 아이들의 부모에게 그 사고들을 보고했지만 한 번도 그들에게서 돌아온 적이 없던 것이 교사에 대한 원망과 질책이었다. (물론 예외는 존재한다. 예외가 없으면 재미가 없지요. 하지만 아주 극소수의 일이기에 이 글에서는 배제하기로.)


아이가 다친 결과만을 놓고 남을 질책하는 것이 아닌,

‘내 아이는 원래 자주 넘어지지, 내가 같이 있었어도 똑같이 일어날 일이었을 거야’라는 식의 과정과 원인을 생각하는 태도가 이들에게는 당연하지만, 어떤 이들에겐 너무나도 너그럽고 관대한 사고방식을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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