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쯤인가 워킹 홀리데이로 호주 멜버른에 왔을 때 만난 마음 맞는 한국인 친구가 있다. 자신감이 넘치고 영어도 잘했던 그 친구는 그때 당시에 미국인 남자친구-지금은 남편이 된-와 롱디(장거리 연애) 중이었다.
하루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영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남자친구와의 긴 연애 기간 동안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들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것인즉슨,
“아 남자친구가 미국인이야? 그래서 너가 영어를 잘하는구나~~”였다.
여기서 질문,
친구는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을까?
그녀는 이 말을 지긋지긋해했고 항상 이렇게 대답한다고 했다.
아닌데? 나 원래 영어 잘했는데?
이 이야기를 나눌 당시에는 나는 싱글이었다. 그리고 몇 달 후 호주인 남자친구가 생기게 되었고 그 후로 나는 친구의 말을 백번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툭까고 얘기해서 나는 정말 많은 노력을 해서 이 정도의 영어 실력을 얻게 된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영어가 모국어처럼 쉽게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고, 가끔씩 렉 걸려서 버벅거리기도 하는데) 남자친구가 호주인이어서 영어를 잘하느니 배우겠느니 하는 말을 듣게 되는 게.. 뭐랄까 말문이 턱 막히는 느낌이랄까.
특히 연애 초기에, 어쩌다가 대화를 나누게 되는 한국인들과는 항상 이 대화 레퍼토리를 반복하곤 했다.
"남자친구 한국인이에요?"
"아니요, 호주인이요."
"헐 대박이다, 좋겠다~~ 영어 엄청 늘겠네!! 결혼 안 하고 뭐해요? 빨리 결혼해버려요~~ 비자 받아야지.”
"아.. (너랑은 이제 대화 안 할래요)."
하지만 덧붙이자면 이전에 쓴 글들에서 열거했지만 나는 영어를 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이 벌써 4년 정도가 되고 나니 솔직히 말해 영어가 더 늘게 된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어의 기초가 다져져서 더 탄탄한 영어를 한다는 게 아니라, 다방면에서 욕을 하는 법을 많이 배웠고 호주인들이 쓰는 표현들을 익히게 되었다.
연애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는 남자친구가 쓰는 단어들 중에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도 알아들은 척 웃으며 넘겼다. 하지만 점점 함께하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우리 서로는 서로를 너무 잘 알게 되었고, 내가 알아듣지 못헀지만 웃으며 넘기려고 할 때, 그는 이렇게 묻곤 했다.
"너 이해 못했지?"
"닥쳐. 설명해주던가."
이렇게 해서 시작된 나의 집요한 질문공세.
내가 듣도 보지도 못한 호주인들이 쓰는 슬랭들과 표현들을 옆에서 생생하게 듣게 될 때마다 나는 그를 붙잡고 늘어진다. 방금 들은 새로운 단어의 뜻을 물어보고, 기본 다섯 번에서 열 번 스무 번 넘게 발음하게 시킨다. 그 뒤에 나는 삼십 번에서 백번 정도 계속 따라한다. 그가 진짜 제발 부탁이니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고장 난 기계처럼..
또 내가 하는 이상한 발음(틀린 발음이 아니라 내가 못하는 몇 가지 발음들이 있다.)을 듣고 웃는 남자친구를 붙잡고, "웃지만 말고 그럼 제대로 된 발음을 해봐!!!!!"라며 괴롭히기 시작한다.
내가 못하는 발음 중엔 W가 있는데, WOLF(늑대) & WOOLWORTHS(호주 슈퍼마켓 브랜드 이름)는 정말이지 아직까지 나를 괴롭힌다. 아무리 해도 힘들어..
내 호주식 영어를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한 마지막 방법은 호주식 발음기호로 내 머릿속을 재정비해나가는 것이었다.
대화 중에 (한국에서 배운) 나의 미국식 발음을 듣고 "뭐라고 했어, 방금??? 완전 미국인!!!"라며 장난으로 놀려대는 남자 친구와 남자 친구 부모님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 왜~~ 이게 내가 배운거야. 그럼 너흰 뭐라고 발음 하는데?"라고 묻고 호주 발음을 머릿속에 저장시켰다.
지금 생각나는, 정말 놀랐던 몇 가지 발음 차이들은 이 세 개 정도이다.
- 얼룩말 ZEBRA 미국식: [zi:brə/지브라] 영국식: [zebrə;/제브라]
- 살구 APRICOT 미국식: [|ӕprɪkɑ:t/애프리컷] 영국식: [|eɪprɪkɒt]/애이프리컷]
- 꽃병 VASE 미국식: [vase/베이스] 영국식: [vɑ:z/바-즈]
생활 속에서 항상 듣고 말하는 것이 영어가 되다 보니 점점 늘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남자 친구가 호주인이어도 내가 모르쇠로 일관한다면 나의 영어가 더 늘 수 있었을까? 배움엔 자신의 관심과 노력이 필수요건이다.
이번 글의 모티브와 감사함은 그저 겉만 보고 판단하는 무지한 사람들의 관심 어린 오지랖에게 돌려야겠다.
모두의 애나
호주, 멜버른에서 차일드케어 에듀케이터로 일하며 먹고살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mandoo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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