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롭게 넘길래도 쉽게 넘길 수가 없는 그것
저번 주에는 길을 걸어가다가 너무나 직접적으로 인종차별을 두 번이나 당했던 아주 재수없는 한 주였다.
(거의 최근 일 년 정도 당한 기억이 없기 때문에 오랜만이라 더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뭐 정말 앞뒤 안 따지고 어이없게 앞통수를 후려 맞은 격이었다. 일 끝나고 남자친구와 통화하며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한 마약쟁이 아줌마가 길가에서 튀어나와서 나에게 직진하더니 내 얼굴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왓아유 두잉 인 디스 컨트리!!!!!!!!(너 이 나라에서 뭐하냐!!) 뻑업!!!(꺼져버려)"
이어폰을 끼고 통화를 하고 있던지라 지금 방금 나에게 일어난 일이 슬로우모션처럼 다가왔다. 한 이초 간의 뇌의 작동 시간을 거친 뒤에야 나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고, 질세라 뒤돌아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을 퍼부었다.(그녀는 이미 약에 취해 계신지라 내가 무슨 말을 하건 상관없이 좀비처럼 저 멀리 갈길 가셨다고 한다.) 이 모든 사건을 수화기 건너편에서 듣고 있던 남자친구는 무슨 일이냐며 걱정을 했고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수화기로 저 X이 뭐라고 하는지 들었어?
뭐 말 같지도 않은 마약 쟁이었는데, 나보고 이 나라에서 뭐하냐고 꺼지라잖아.
그래서 나도 욕했어.
잘했다며 토닥여주는 남자친구, 맨 처음에 멜버른에 왔을 땐 저런 일이 생기면 한마디도 못하고 훌쩍였을 내가 아주 용감해져서 바로 욕을 날리는 걸 보고 뿌듯하다고 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정신이 멀쩡히 박힌 사람에게 당했기에 더 열이 받았지 않나 싶다. (인종차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정신이 있는 사람이 할 짓은 아니지만. 그렇게 취해 보이지도, 마약에 취해 보이지도 않았음을 의미)
저 일이 있은지로 바로 이틀 후, 학교에서 알게 된 대만인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서 기분 좋게 치맥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네다섯 명의 백인 그리고 인도인이 섞인 그룹. 나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가 열릴 수밖에 없었다. 기초적인 중국말을 과장해서 지껄여가며 마구 웃어대는 그들, 기분이 싸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싸함은 나에게 오롯이 다가왔다.
그룹의 대부분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고, 마지막으로 걸어오던 인도인 남자가 나를 쳐다보며, "니하오 냥냥?"이라고 씨부렸다. 나는 바로 그를 쳐다보며, "왓더뻑, 뻑업맨"이라고 외쳤다. 내가 욕하는 것을 들은 그룹 모두가 일제히 나를 보려 뒤돌아서서 "오오~~~ 하하하하하하하"하며 웃어댔다. 쫓아가서 지랄을 하며 깽판을 치고 싶었지만 문제는 내 옆에 있는 친구였다.
그녀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황 파악조차 하고 있지 못했다.
내가 씩씩대며 돌아서자 그제야 친구는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다.
아니 어떻게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바로 우리 옆에서, 우리 둘 옆에서, 우리 얼굴을 쳐다보고 조롱하려고 허리까지 숙여가며 얘기한 그인데, 어떻게 나만 알아보고, 알아듣고, 그리고 열이 받을 수 있는 거지?
현재 나는 호주 멜버른의 한 차일드 케어(유치원)에서 일을 하고 있고,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에 대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아니, 일을 하는 동안에는 아예 차별이란 것을 한 번도,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좀 더 커뮤니티 적인 공간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도 그렇고,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이 사회에서 좀 더 나은, 걸러진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욱 크고 중요한 요소는 유치원 교사들이 아이들을 교육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내가 일하는 센터에서는 어떤 종류의 차별도 용납하지 않고, 무의식 중에 녹아내린 성차별도 중지하기 위해 실질적인 개선을 위한 노력을 행하고 있다,
그래서 가끔 받는, "동양인인데 호주에서 유치원 교사가 될 수 있나요?"라는 질문엔 갑갑하지만 자신 있게 대답해준다. "언어만 제대로 된다면 인종은 상관없어요."
나는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다.
이 예민한 성격 덕분에 한국과는 정반대인 이 호주 사회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게 되었고, 내 언어가 아닌 영어로 하는 대화 안에서 상대방이 하는 말이 진심인지 비아냥대는 것인지를 쉽게 알아챌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예민해서 인종차별을 더 많이 겪었던 걸 몰랐을 때, 남들에게 종종 물어보곤 했다.
"나 이런 일을 겪었어, 너도 호주 와서 인종차별 겪어본 적 있어?"
이 질문에 돌아오는 큰 반응은 이렇게 세 가지였다.
1. 어, 나는 한 번도 안 당해봤는데, 왜 너는 그렇게 경험이 많지?
2. 네가 너무 예민해서 과대 해석한 거 아닐까? 그냥 무시해.
3. 미친 자식들, 나도 많이 당해봤지. 이 나라는 이민자의 나라라고. 못 배워 먹어가지고는.
1번의 반응을 하는 사람은 아마 아직 이 호주 사회에 예쁜 환상만을 가지고 있는 적응자이거나, 정말 무딘 자이거나, 운이 좋은 자일 것이다. 같이 모욕을 당했지만 그 상황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던 내 친구처럼.
이렇게 무디고 무딘 사람들은 당신의 인종차별 이야기를 듣고 쉽게 2번의 이야기도 덧붙일 것이다. 하지만 인종차별에서 과대해석이란 건 없다. 그것도 저렇게 적나라한 모욕에서는.
누군가가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얘기하면 3번처럼 대답하며 같이 팔짝팔짝 뛰어주자.
인종차별은 당한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자신의 불안정함을 타인에게 투척하는 머저리들의 짓이다.
나는 3번의 익스트림 버전인 내 짝꿍의 반응이 가장 맘에 든다.
"욕했어? 잘했어. 다음엔 이 욕도 섞어 써. 여기가 미국이 아닌 게 다행이지, 미국이었으면 총으로 쏴버렸어. 어디 못 배운 것들이 아직도 저런 말도 안 되는 인종차별을 하지? 다음에 또 겪으면 차도로 뛰어들어가서 차에 치어버리라고 소리지르고 내가 알려준 욕도 같이 싸질러줘."
슬프지만 다행인 건, 내가 백인인 호주 남자친구와 함께한 4년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길을 다닐 때에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시비를 건 사람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약해 보이는 그룹(동양인/여자)을 겨냥해서 자신들의 아무_쓸모없음을 아주_쓸모있음으로 표출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안쓰러운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어떤 형태로던 차별을 받는다면 똑 부러지게 설교를 하던 욕을 하던 싸움을 하던 하되, 제발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지는 말자.
모두의 애나
호주, 멜버른에서 차일드케어 에듀케이터로 일하며 먹고살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mandoo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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