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두의애나 Feb 28. 2018

호주 멜버른에서의 잡 헌팅 : 차일드 케어

그래서 “어떻게, 어떠한 방법으로” 일을 구하게 된 것인가에 대해 얘기하지 않은 것 같다.





시간을 거슬러 2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면 나는 아직 하스피탈리티(서비스직-카페일) 종사자였다. 학비가 3개월마다 2백만 원 정도였는데 모은 돈이라고는 첫 학비 낼 돈뿐이었다.(더 있었나? 기억력이 정말 젬병인데 숫자엔 더 약하다.) 하지만 돈이라는 게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기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내 능력으로 못할 게 없다고 여기며, 한국에서 멜버른으로 첫 학비를 턱 하니 내고 다시 여기, 호주 멜버른으로 날아왔다. 다시 돌아와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할 수 있는, 생각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는 카페, 레스토랑 서빙 일 밖에 없었다. 뭐 딱히 못 할 것도 아니고 (지금은 너무 혐오.. 사람이 싫다..) 지금까지 쭉 해왔던 일이기에 돌아오자마자 구직활동을 했다. 운 좋게 구직활동 몇 주 만에 두 가지(둘 다 카페) 일을 잡아서 흔히 말하는 투잡을 뛰었다. 학교는 일주일에 두 번 - 한주에 온라인 수업/과제 8시간이었던가 - 나머지 일주일의 5일은 계속 일했다. 쉬는 날이 하루도 없었지만 불평할 틈도 없이 나는 학비, 생활비를 벌기에 바빴고 새로 시작한 공부와 과제에 빡세게 시달리기도 했다.




그래도 견딜만했다.


다 지나고 났기에 견딜만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멜버른으로 돌아와서의 삶은 극단적이지 않고 물 흘러가듯 잔잔했기에 행복했던 것 같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 때려치우고 싶은 적도 없었고 또한 매일매일이 행복해 미쳐버릴 만큼 환상에 빠져 사는 정도는 아니었다. 조급하고 스트레스받을 때도 많았다. 왜?





공부가 끝나가기 중간 정도가 되어가니 학교 반 애들의 반 이상은 공부와 병행하여 이미 차일드 케어에서 일하고 있었다. 실습한 센터에서 캐주얼 일을 제안받아하는 애들이 많았고 그 케이스가 아니라면, 실습 센터와는 다른 새로운 센터를 스스로 알아봐서 일을 구한 케이스. 확실히 전자가 우세한 비율을 차지했다.


그럼 나는 왜 그 기회를 잡지 못했을까? 운도 더럽게 없지, 내가 맨 처음으로 실습을 시작한 센터는 학생은 캐주얼로도 안 뽑는다는 말을 들었다. 일찍이 마음을 놓고 들이댈 생각도 안 했다. 두 번째 실습 센터의 캐주얼 제안은 정말 급작스럽고 공식적이지 못하게 다가왔다. 카페에서 일하고 있는 어느 아침, 실습 센터 원장에게 오늘 일해줄 수 있냐는 전화를 받았다. 그야말로 구멍 때우는 식의 내 첫 차일드 케어 잡 오퍼. 미안하지만 지금 일하고 있기 때문에 못 할 것 같다고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 제안과 거절의 전화 한 통이 완벽한 "No"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실습을 잘 이행하면 또 한 번 잡 오퍼가 들어올 줄 알았지만 정말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다시 제안이 들어오지 않았다. 젠장할.




 


학생 비자로는 법규상 2주에 40시간밖에 일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치원에서 캐주얼(비정규직)로 일하면 학비를 대기에는 턱도 없는 돈벌이 었다. 그래도 공부하면서 공부의 연장선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이상적으로 더 바랄 게 없는 것인데 일단 눈 앞에 놓여있는 학비와 생활비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공부하는 일 년 동안 카페 잡 두 개를 놓아주지 못하고(한 군데는 텍스 잡으로 한 주에 20시간 안으로 일하고, 다른 한 군데는 캐시 잡이라고 눈속임해가며 그냥 돈을 현찰로 때려 받는 일이다.) 그렇게 붙잡고 살았다.



졸업이 6개월 남았을 때쯤 - 재작년 12월 - 졸업하고 나서의 원활한 구직활동을 위해 이제는 캐주얼(비정규직) 일을 잡아야 될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학비도 한 번만 더 내면 됐었고, 이렇게 계속해서 카페일만 하고 있다가 졸업 후에 구직활동을 할 때 혹시라도 불리해질까 봐 마음이 조급해졌달까. 연말에는 대부분 사람을 뽑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일단 마음을 내려놓고 래쥬메(이력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연말 싱가폴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이력서를 돌리기 시작했다. 발품을 팔아 돌린 하스피탈리티(서비스업)와는 달리 유치원 구직활동은 좀 더 프로페셔널하게 구글링과 이메일로 진행했다.


시작으로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 근교로 차일드 케어를 검색 시작. 구인을 하고 있는지, 내가 원하는 조건과 그들이 원하는 조건이 일치하는지 비교하며 이메일을 넣었다. 세 군데에서 연락이 왔는데 한 곳은 큰 프랜차이즈 유치원이었고 다른 한 곳은 비영리 유치원, 마지막 한 곳이 지금 일하고 있는 개인 소유의 유치원이었다. 


첫 큰 유치원은 커서 그런지 큰 만큼 정신머리가 하나도 없었다. 멜버른에서 진행될 인터뷰 하나 잡는데 시드니에 있는 담당자와 통화를 두세 번 해야 했다. 전화로 사전 인터뷰를 진행했고 면접 당일 준비해야 될 안내 서류 이메일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인터뷰 당일날까지 메일이 오지 않았다. 확인 전화를 걸어서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었고, 이메일을 다시 보내주겠다고 답을 받고 전화를 끊었다. 결국 아무 이메일도 받지 못했다. 


두 번째 비영리 유치원은 인터뷰까지는 순조로웠다. 한여름, 일대 이로 진행된 한 시간 동안의 인터뷰는 에어컨 바람 때문에 너무 추웠다는 인상을 받고 끝났다. "캐주얼을 뽑는데도 이렇게 빡세게 인터뷰를 진행하네"하고 한 번 놀랐고, 일주 안에 확정 이메일이 올 것이라는 마지막 면접관의 말이 "지금 행정팀이 너무 바쁜 관계로 심사 기간이 지연됐습니다"하는 이메일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지금 일하고 있는 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집에서 가까운 센터였지만 길치인 나를 걱정하여 인터뷰 전에 남자 친구와 함께 찾아가 봤다. 걸어서 20분, 최고의 출퇴근 조건이었다. 하지만 밖에서 본 센터의 모습은 마치 유령의 집..? 겉모습만 보고 "와 이렇게 작은 센터도 있구나. 이거 인터뷰 가야 돼 말아야 돼"라고 생각하며 반신반의한 채 돌아왔다.

매우 더웠던 여름날 인터뷰.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센터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펼쳐진 풍경은 낡고 작은 방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내가 들어가자 아이들은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토들러반의 영어 액센트가 굉장히 세고 독특한 선생님이 나를 맞이해줬고 자신이 준비해온 서류를 복사하는 동안, 구석에 의자에 앉아있으라고 했다. 내가 앉아있던 구석의 의자 주위에는 두 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한 아이는 퍼즐을 하다 말고 내가 의자에 앉으니 토끼 같은 눈을 하고 나를 계속해서 뚫어지게 쳐다봤다. 한 아이는 나에게 달려와서 인사하며 안아주고 뽀뽀를 해줬다. (얘는 지금 킨더반에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뽀뽀 쟁이다.) 서류 복사가 끝나고 돌아온 선생님은 나에게 센터 투어를 시켜줬다. 집을 개조해서 만든 센터라 내부는 좀 작은 듯싶었지만 밖으로 나간 순간 "와" 하고 외마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뒷마당이 정말 크고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본 - 유치원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건물 유치원 - 센터들과는 개념 자체가 다른, 정말 "밖" 그 자체 자연친화적 공간이었다. 뒷마당을 본 순간, 아 뽑아주기만 한다면 여기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미로 같은 센터 투어를 진행하는 내내 "인터뷰는 언제 하지? 인터뷰도 안 하고 센터 투어부터 시켜주네"라고 생각했다. 다시 반으로 돌아온 나에게 이 선생님이 하는 말. "사실 다음 주부터 너한테 줄 쉬프트가 있는데 너 괜찮겠니?" '오잉 이게 웬 떡? 그런데 어떻게 내가 어떤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바로 쉬프트를 주나, 이 센터 허술하네.' 하고 생각헀다. 


하지만 나중에 알았다. 이 첫 주 짧은 쉬프트들이 나를 평가하는 시간이었음을. 그리고 나는 그 평가에서 완벽하게 살아남아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호주 멜버른 차일드 케어 교사의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