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쿠버, No worries
도시는 늘 도착보다 늦게 시작된다. 짐을 풀고, 물을 끓이고, 창밖을 한 번 더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그곳에 와 있다는 실감이 난다. 벤쿠버의 첫날은 그렇게 조용히 흘러갔다. 숙소 근처를 걸었고, 밥을 먹었고, 커피를 마셨고, 결국엔 맥도날드를 시켜 먹었다. 여행의 첫 끼는 언제나 그렇듯 특별하지 않았고 그래서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좋았다.
도시는 걷는 속도로 드러났다. 다운타운에서는 계획보다 창문을 더 많이 보았고, 물건보다 사람의 얼굴을 더 오래 기억했다. 도서관에 들어가서는 여행지에서조차 책을 찾는 나 자신이 조금 웃겼다. 카페에 앉아 있다가 저녁이 되었고, 와인을 마시며 이곳의 밤은 유난히 서두르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셋째 날에는 맛이 기억을 앞질렀다. 그랜빌 아일랜드에서 먹은 음식들은 하나같이 과장 없이 좋았다. 시장에서는 사람들의 말이 부딪히는 소리가 파도처럼 들렸고 해 질 무렵 바다를 따라 걸을 때는 ‘여행을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어떤 순간은 사진보다 몸에 먼저 남는다.
하루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늦잠을 자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달리고, 공원을 걷고, 브런치 가게에서 기대 없이 주문한 메뉴가 맛있을 때의 기쁨 같은 것들. 그날은 계획이 없어서 더 정확하게 기억난다.
시애틀로 가는 날은 새벽부터 시작됐다. 잠을 거의 못 잔 채 국경을 넘었고, 워싱턴 대학의 캠퍼스를 걸었고, 비싼 계산서를 보며 웃음도 나왔다. 기대가 컸던 하루는 늘 조금 어긋난다. 아쉬웠고, 속상했고, 그래서 오히려 솔직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곳은 캐나다보다 조금 더 거칠고, 조금 더 자유로워 보였다. 언젠가는 꼭 다시 오겠다고 혼자만 아는 약속을 했다.
문제는 돌아오는 길이었다. 버스는 연착되었고, 저녁은 놓쳤고, 새벽이 되어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문을 닫자마자 배달을 시켰다. 그날의 마지막 기대였다. 하지만 음식이 도착했을 때, 메뉴 하나가 빠져 있었다. 전화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호텔 전화는 한국에서 알던 방식이 아니었다. 1을 누르고 9를 누르고 또 무언가를 누른 뒤에야 번호를 누르라고 했다. 머릿속이 하얘진 채로 아무 숫자나 눌렀다.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결국 포기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호텔 프런트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혹시 119를 누르셨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그런 적 없다고 말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직원은 조심하라고 말했다. 잘못 눌러도 경찰이 올 수 있으니 앞으로는 주의하라고. 알겠다고, 죄송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몇 분 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 경찰이 서 있었다. 한국에서도 한 번도 직접 본 적 없는 경찰을, 벤쿠버에서, 그것도 호텔 방 앞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내가 숫자를 연속으로 눌렀던 모양이었다. 경찰은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괜히 안심시키듯, 울상인 나에게 정말 괜찮다고 한 번 더 말했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웃음이 터졌다. 그날 밤, 빠진 메뉴보다 그 장면이 더 오래 남았다.
여행의 끝으로 갈수록 나는 이 도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한국의 얼큰함이 그리워 먹었던 마라탕이 최악이었던 날도 있었고, 초코케이크와 커피가 유난히 완벽했던 오후도 있었다. 피자가 너무 맛있어서 포장해 온 저녁도, 날씨가 모든 걸 용서해 주던 스탠리 파크의 아침도.
이곳에서는 늘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How are you?"
"Thank you."
"No worries."
문을 잡아주는 손, 길을 비켜주는 몸짓, 눈이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들. 식사 중간에 괜찮은지 묻기 위해 다시 돌아오던 서버의 걸음.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여행이 끝날 무렵 나는 이 도시에서 무언가를 많이 보았다는 생각보다 많이 안심받고 돌아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고, 그래서 괜찮았던 날들. 새벽에 경찰이 다녀간 호텔 방에서도, 아침에 공원을 달리던 얼굴에서도, 이 도시는 끝내 나를 다그치지 않았다.
괜찮다고, 정말 괜찮다고.
벤쿠버는 고맙다는 말보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더 오래 남기던 도시였다.
그 말 하나로, 여행은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