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친 말로는 사랑할 수 없어서

작은 가지를 치는 법

by meldliy

무척, 괜히, 지나치게. 없어도 되는 말 같지만 다른 말을 수식하기 위해 존재하는 말들. 나는 한때 그런 말들을 덜어낼수록 진솔함이 깔끔하고 투명하게 드러난다고 믿었다.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게, 핵심만 말하는 사람이 더 단단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끔은 그 말들을 쓸데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나치게 길게 늘어놓는 일이 오히려 더 진솔할 때가 있었다. 비슷해 보이지만 한 끗 차이로 다른 의미를 가진 말들. 그 말들은 혼자서도 존재하고, 함께여도 존재한다. 서로 기대지 않아도 서 있고, 기대면 또 다른 결을 만든다. 그 고독의 힘을 생각하면 겁도 없이 그 말들만 영원히 늘어놓아도 죄가 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언젠가부터 말을 하는 게 무서웠다. 말을 안 해도 무서웠고 말을 해도 무서웠다. 정리가 안 된 채로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도태가 될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런데 두려움의 위압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입을 열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내가 더 싫었다. 그렇다고 정리가 안 된 채로 말을 하면 또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하고자 하는 말을 나조차도 모르니까 그들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아까 말한 단어들이 가진 고독의 힘을 훔쳐 사용한 격이 되어버렸다. 그럴싸한 단어들. 어디선가 본 듯한 문장들. 내 안에서 완전히 숙성되지 않은 말들. 그러고 나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나는 뭐가 그리 떳떳했는지 훔친 말을 뻔뻔하게 드러냈고, 그게 내 안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는 걸 내 앞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친절한 목격자들이 모를 리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이렇게 엉망이 된 이유를 찾고 싶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문제는 말하기 이전에 듣기였다. 글자 하나하나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도, 적어도 뉘앙스 정도는 상대가 입을 다문 순간에 알아챌 줄 알았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듣는 시늉만 했다. 이 말을 쓰는 지금도 정말 부끄럽고 창피하다. 그 당시 엉망이던 내 앞에서 상대가 되어주던 목격자들에게 이제 와서 너무 미안하다. 진심으로 들어주지 않았으니 진심 어린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자격지심이었을까. 그들의 말을 듣고, 그 말에서 가지를 친 말들을 다시 건네는 일을 하기엔 나는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 괜히 깊은 척을 하다 들킬까 봐 먼저 겁먹던 마음. 솔직히 말하면 왜 듣는 게 그렇게 힘들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귀를 여는 일에만은 집중해보기로 했다.


귀를 여는 일. 그건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상대를 판단하지 않는 일. 말의 내용물을 재단하지 않는 일. ‘이 말은 맞고 저 말은 틀리다’고 속으로 줄 세우지 않는 일. 그저 듣는 일. 그러다 보니 경험이 많지 않아도 작은 가지 하나쯤은 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의 말에 조심스럽게 덧붙일 수 있는 작은 연결 하나. 그러다보니 작은 가지가 모여 큰 가지가 되기 시작했다. 물론 매번 큰 가지를 치는 건 아니다. 그럴 줄 알았다면 나는 여기저기서 불러주는 곳이 많아 강연을 하러 다니는 마인드 코치쯤은 되어 있었겠지. 그걸 바라는 건 아니다. 나는 아직도 귀를 여는 연습을 하는 사람이다. 상대를 따지지 않고, 말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고, 그 안의 떨림을 먼저 받아보려는 사람. 귀를 열면 언젠가는 입도 열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입을 여는 게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순간이 오면, 내 앞에 서 있는 이들은 나를 고개 숙이게 만드는 목격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차용증으로 증인이 되어주는 사람들이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훔친 말이 아니라 들어서 품은 말. 품어서 건네는 말.


나는 이제 안다. 사랑은 말하는 기술이 아니라 듣는 태도에서 먼저 시작된다는 걸. 상대를 끝까지 들어보려는 마음, 내 안의 부끄러움까지도 숨기지 않고 인정하려는 마음. 그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말은 사랑이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금 서툴더라도 먼저 듣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어쩌면 입보다 먼저 열린 귀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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