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idarity
"탈레반요?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친절한 사람들을 본 적이 없어요"
십 년 전쯤에 아프가니스탄으로 단기 선교를 다녀왔던 조카애의 말이다. 물론 나는 반신반의 했다.
역사가 100년이 넘는 신문 프레스 지 일면 전체에 수많은 사람들이 엎드려 기도하며 절하는 사진이 실렸다. 금요일 오후 노스 헤글리 공원에서 있었던 추모식의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뉴질랜드 내의 모든 무슬림들이 다 나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오해였다. 무슬림이 아닌 시민들이 많이 참여했다고 한다. 자발적인 연대를 상징하는 표시였다. 듣고 보니 감동적이었다.
병원에 근무하는 사람에게서 들었다. 무슬림 이맘 한 분이 금요일 사고로 입원을 했는데 상당히 중상을 입어서 처음에는 위험했다고 한다. 그분이 입원을 한 이후부터 무슬림 커뮤니티의 병문안객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집안의 가족이 병원에 입원을 해도 다들 찾아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여기까지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 문병객들이 한결같이 병원 직원들의 주의사항을 너무도 잘 지키는 바람에 온 직원들이 많이 놀랐다고 한다. 주의 사항 한 번만 하고 나면 다시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없었노라고. 우리 한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질서를 잘 지키기로 유명한 이곳 키위들조차 때로는 입이 아플 지경으로 주의를 주어야 하고 그 부분의 스트레스가 상당하다고 했다. 이제껏 그처럼 많은 문병객들이 내원을 하면서도 그토록 잡음 없이 질서를 잘 지키고 주의 사항을 잘 지키는 커뮤니티는 처음 봤다고 한다.
사고가 나고 며칠이 안 지나서 무슬림 커뮤니티에서 많은 양의 음식을 병원으로 가져왔더라며 울컥하더라고 했다. 이후 치치뿐만 아니라 뉴질랜드 사회에서 무슬림들의 위상이 상당히 높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천만 불이 훌쩍 넘긴 후원금 소식을 들을 때마다 따라오는 걱정을 생각하면 나는 하릴없는 기성세대이다. 갑자기 밀어닥친 후원금으로 해서 무슬림 사회가 분열되거나 이로 해서 잡음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내 말을 듣던 작은 아이가 하는 말이다.
"엄마, 그건 엄마가 모르시는 말입니다. 무슬림들이 돈 갖고 그러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작은 애가 고등학교에서 사귄 친구들이 일곱 개 무슬림 국가 출신이었다. 친구들에게 돈을 빌린 다음에 갚을 때 작은 이자라도 붙이려면 도리어 화를 낸다면서,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나를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단다.
작은 애가 몇 년 전에 호주에서 직장을 구하러 갔다가 일도 못 찾고 친구 압둘의 플랫 하우스에서 몇 달을 지낸 적이 있었다. 그 기간 동안도 그 친구의 신세를 졌다. 잠깐 일을 하긴 했지만 접고 치치로 돌아올 적에는 그 빚을 다 못 갚고 돌아왔다. 이후 일을 시작하고서는 다 갚았지만 이자 비슷한 것도 못 내게 했노라고.
뜻밖의 비극 앞에서 들려오는 얘기들이 이제껏 내가 가졌던 무슬림 사회와 이슬람이란 종교에 대한 오해가 부끄럽기 조차하다, 서양 언론과 한국의 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의 굴절된 시각의 해악이 자못 크다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부터 지금까지 52년을 예수쟁이로 살고 있고 이 생명이 다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날까지 예수쟁이로 살고 싶다. 아니 그렇게 살 것이다. 그렇지만 골수 교회주의자들의 지도와 그릇되고 편협한 가르침의 세례를 받았던 예수쟁이 삶이었다. 최근까지도, 하나님과 예수님이 아닌 교회 즉 목사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받고 협박과 세뇌의 왜곡된 주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교회 이외의 모든 종교와 신앙을 적대시하는 우리 교회들이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들이었음도...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매 순간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함부로 쏟지 말기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