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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머레이가 흐느끼며 울 때...

윔블던에서 - 2012

by 백설공주

3년 전인가 겨울 이맘때, 켠다고 켰던 채널 1에서 윔블던 테니스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세상이 잠든 그 새벽, 지구 반대편 영국의 푸른 잔디와 하얀 복장의 선수들, 탕탕거리는 테니스 볼 소리가 어찌나 좋던지.



그때 첨으로 앤디 머레이라는 선수를 보았다. 경기가 안 풀리거나, 맘에 드는 패싱샷을 날리면 목울대를 울려대며 기성과 괴성을 질러 대는데, 그와 맞추어 가족석에 앉아있던 중년의 부인도 같이 고함을 질러대는 거다. 순간... ‘아하, 엄마구나, 되게 닮았네’였다. 군살이라곤 없어 보이는 외양에 쇠테 안경을 쓰고서 경기장을 쏘아보며 몰두해 있는 모습에서 풍기는 강철 같은 무엇이 느껴졌다. 자기네 선수가 윔블던 코트를 달군다고 영국팬들의 성원이 열화와 같았지만, 아쉽게도 준결승의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엄마와 아들이 펼쳐내는 기성과 괴성의 하모니만 깊은 인상을 남기고.



그러고 좀 지나…, 도서관에서 순전히 실수로 앤디 머레이를 다룬 책이 잡았길래 대충 훑었다. 그럼 그렇지, 일찍부터 테니스 신동으로 불렸던, 영국에서는 상당히 애지중지하는 친구였다. 어릴 적부터 비쩍 마른 몸에 갈색의 곱슬머리, 약간의 옹니에 주근깨 투성이의 그리 귀엽지 않은, 당장이라도 나가면 비슷한 사람 찾기가 어렵지 않을 듯한 친구였지만 그 강철 여인의 아들이라는 것이 맘을 끌었다.



그래 저래 몇 년이 지나서 마침 방학이고 뉴스에서 윔블던 소식이 있길래 며칠간 새벽에 또 좋은 구경을 했다.

시간은 공평해서 아들은 더 성장했고 엄마는 이전보다는 나이 든 티가 났지만 이번에는 나의 앤디가 상당히 선전했다. 덕분에 준결승에서 체격이 좋은 프랑스 선수를 넘고 결승 진출이 확정되었을 때도 볼 만했다. 그의 엄마가 벌떡 일어나며 두 주먹을 쥐고 괴성에 가까운 환호를 터뜨릴 때, 정작 아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뭐라고 중얼거리며 약간은 울먹이면서, 기뻐하기보다는 감격에 넘친 듯한 설명이 좀 안 되는 표정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로비에서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면서 ‘앤디, 저 친구는 되게 내성적이고 말주변도 에지간이 없을 거야’했던 첫인상과 어찌나 같은지…. 그리 기뻐하는 표정도 아니고 그저 덤덤한, 자칫하면 우울해 보이기조차 한 얼굴이었다. 몇 마디 안 되는 그 말을 하면서도 어려운지 손으로 자꾸 얼굴을 문지르고, 부모님에 대해서 물을 때 딱 한번 슬쩍 웃는 정도였는데 그것도 상당히 맘에 들었다. ‘암, 운동선수란 저래야지. 온갖 폼만 잡고 겉멋만 들어서 뭣에 쓴다냐’하는 생각까지 해가며.



그럼에도 오늘 아침 슬펐다. 새벽의 윔블던 남자 단식의 주인공은 앤디 머레이가 아니었기에. 경기를 마치고 준우승자에게 수여된 은빛 접시를 들고 코트 내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앤디가 마이크를 든 채로 울면서... 울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낄 때, 그를 지켜보던 그의 엄마 그 강철 여인이 기대어 흐느낄 때, 나도 같이 울었다. 단언하지만 그 강철 여인이 슬퍼한 것은 아들이 우승을 놓쳐서가 아니라 아들의 슬퍼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아픔이었기에. 아들이 세계 테니스 동네에서 상위 랭커에 들기까지 함께 했을 시간들과, 신동이라 불렸던 아들의 일어섬과 넘어짐의 그 환희와 고통의 순간들이 오버랩되어 밀려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기회는 또 있다고 말해 주고 싶다. 서비스가 쎈 걸 보면 체질도 타고났고 아직은 어리니 시간도 있다고. 다음에는... 금빛 트로피를 들고 감격에 겨워 또 말을 제대로 못 잇는 앤디 머레이를 기대한다고, 정상의 문은 강철 여인(엄마)의 사랑받는 남자(아들)에게 열려 있다고.



사족-

오늘 경기는 세 번째 세트에서 명암이 갈렸다고 해야겠다. 6번째 앤디의 서비스 게임에서 열한 번의 듀스를 주고받다가 결국 실패한 바람에.


12.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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