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_03

죄가 없는 사람

by melina

부당한 규제가 심할수록 사람들은 그것을 꺾는 것만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기분에 휩싸여 쉽게 고조되고 만다. 그럴 때는 하나같이 자신이 다 옳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행동한다. 자신의 논리에는 빈틈이 없고, 그렇기에 자신이 한 선택은 올바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베레시트가 정의를 다루는 방식은 독특했다. 범법자, 특히 살인범과 성범죄자에게 파격적인 형벌을 내리는 것으로 전 세계적인 바이럴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실에서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아동강간 살해범을 실제와 똑같이 디지털 스캔해 월드 내의 스피드뉴스로 형 집행 소식을 알렸다. 2월 10일 자정, 광화문 광장에서 사형을 집행한다는 것이었다.

사형 집행은 유저들이 직접 만든 여러 가지 형태의 미니게임으로 진행되었다. 사형수를 마구 구타해 제한 시간 안에 HP를 다 닳게 하는 액션 RPG형, 정확하게 폭탄을 던져 터뜨려버리는 캐주얼 조작형, 추리 문제를 풀어 사형 집행 버튼을 작동시키는 퍼즐형 등 원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다. 아무리 실사 3D라 해도 캐릭터일 뿐이었고, 미니게임은 아기자기한 이펙트들을 더해 꽤나 거부감 없이 몰입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하지만 그날, 사람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범죄자를 직접 처형하는 경험을 했다. 그건 작아 보이지만 실은 돌이킬 수 없이 엄청난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던 정의에 대한 관념이 통째로 뒤집어질 만큼.

처음엔 아동 강간 살인범이, 그다음엔 유명한 연쇄살인범이, 그다음엔 성착취물 제작자가, 그다음엔 존속살해를 하고도 법의 보호를 받은 촉법 살인범, 상습 음주운전 뺑소니범과 불법촬영물 유포로 피해자를 자살에 이르게 한 데이트폭력 범죄자가 차례로 사형 집행을 당했다.

처형에 대한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자 자신을 목사라 일컫는 한 남자가 광장에 나와 디지털 사적제재를 멈추자고 설교했다. 현실에서도 종교인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자 돌을 던져라,라는 말에 사람들은 코웃음 쳤다.

그러는 와중에 베레시트의 든든한 뒷받침이 되는 로어 코인은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한국 경제가 휘청할 정도까지 성장했다. 그래서인지 디지털화폐와 관련된 온갖 법적 규제들은 논란이 일다가도 스스로 비껴갔다. 기묘한 일이었다. 타당한 원리 원칙으로 세상이 구성되어 있다고 굳게 믿어왔기에 어떤 부당함에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견뎌온 정민이었다. 이혼한 여성,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으로서 감당했던 남다른 시선들도. 전체의 관점에서는 균형의 일부일 거라고 위안해 왔다.


‘근데 이모, 죄가 없으면 돌을 던져도 돼?’


무엇이 옳은 것이냐 묻는 희재에게 정민도 대체 무엇이 평등이고 정의인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런 게 실재하는지도 모르겠어.

정민은 이번 면담을 통해 단 오 분만이라도 희재와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랐다. 희재는 최소한으로 먹고 배설했다. 숨조차도 아껴 쉬는 듯했다. 마치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불과 몇 달 전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말라버린 희재를 보자 참을 새도 없이 한숨이 나왔다.

“밥은 왜 안 먹어.”

희재는 대꾸도 하지 않고 일종의 의사표현으로 도시락이 담긴 쇼핑백을 옆으로 치웠다. 지저분하게 자라버린 앞머리가 눈을 찌르는데도 상관없는 듯 굴었다.

“빨리 검사나 해줘. 이모도 바쁘잖아.”

“오늘은 면담이야.”

피곤하다는 듯 한숨까지 쉬고 나서야 희재는 정민과 마주 앉았다. 조그마한 머리에 가득 뇌파 측정기와 뇌 스캔 센서를 붙이고 감별을 위한 AI 에이전트를 구동했다. 오늘 정민의 목표는 희재의 주장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세미나에서 연구자가 주관적 관점을 가지고 임하는 것이 연구 윤리에 어긋나지 않냐는 질문을 받은 기억이 떠올랐다.

“최근 증상에 차도는 있었어?”

텅 빈 눈으로 희재가 고개를 저었다. 증상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건 굳이 묻지 않아도 같이 사는 정민이 더 잘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기 가족의 문제라면 어느 누가 감정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애초에 이 연구는 희재 하나를 위해 시작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순간 가만히 앉아있던 희재의 고개가 왼쪽으로 휙 돌아갔다. 틱이었다. 희재가 틱 증상을 말했을 때라도 자세히 들여다봤으면 지금과는 달랐을까? 희재가 발병한 이후 정민은 수도 없이 자신이 미처 기회인지도 모르고 놓쳤던 아쉬운 순간들에 대해 자책했다.

“제대로 복용 안 한 거 아니야?”

“이모가 혓바닥 밑까지 다 검사했잖아.”

진실 반응. 희재가 발끈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이래선 면담이고 뭐고 진행이 될 리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대응해 버린 것에 책임을 느끼며 정민은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려 애썼다.

“너의 신체에 대해 질문할게. 희재는 여성의 몸이 어때야 한다고 생각해?”

“아무 생각이 없어.”

진실 반응. 여성 신체에 대한 강압적인 편견으로 자신의 몸을 거부하는 양상은 아니었다. 또 한 번 고개가 휙 돌아갔다. 불편한 기색. 희재는 몸의 자아감 뿐 아니라 통제까지도 잃어가고 있었다.

“가정이나 친구, 학교 등에서 신체적 학대나 공격을 느낀 적이 있니?”

“내 몸이 아니라서 그러든 말든 상관없어.”

진실 반응. 주사, 간지럼, 차가운 자극 등에도 뇌파는 일정한 그래프를 그릴 뿐이었다.

“네 몸을 바라봤을 때 느끼는 감정들을 이 카드 중에 골라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아니, ‘내 몸’이라고 느끼지 않아.”

정민은 서랍 속에서 사진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사진을 본 희재의 반응이 쉽게 유추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감이 컸다. 혹여나 사진이 희재를 더욱 자극해 더 이상의 면담이 불가능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보다 희재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두려웠다.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까 봐.

“지금부터 사진을 한 장 보여줄 거야. 마찬가지로 자세히 보고 네가 느끼는 감정들을 카드에서 골라줘.”

서랍에서 사진을 꺼낸 정민은 떨리는 마음으로 희재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사진 속에는 알몸으로 연구실에 뛰어들어 왔던 희재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정찰 로봇에 의해 찍힌 사진이었다. 자신을 보내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몸을 난도질해 죽어버릴 거라고 악을 쓰던 소녀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정민은 마음이 쓰려왔다. 그날 나는 희재를 위해 무엇을 했어야 하는 걸까.

“아무것도.”

진실 반응. 희재의 눈엔 어떤 충격도 슬픔도 공포도 담겨있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종류의 기대와 일종의 해방감으로 반짝였다. 정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무엇을 참을 수 없는지 말하지 못했다. 희재의 말은 거짓이어야만 했다. 자신의 몸을 다 버리고 허상의 세계로 이주하겠다는 걸 어떻게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희재는 환자였다. 약을 먹든 수술을 하든 해서 정상으로 고쳐놔야 하는 환자.

“몇 번을 말해야 믿을 거야? 그냥 무거운 무게 추 같아. 아무 쓸모도 없이 나를 묶어두는.”

“넌 네가 다 옳다고 생각하지? 네가 제일 똑똑한 것 같지? 아니야. 세상엔 다양한 측면의 논리가 있어. 너의 의견도 그중 하나일 뿐이고, 네가 아무리 맞다고 우겨도 틀릴 수도 있는 거야.”

또다시 참지 못하고 쏘아붙이는 정민에게서 희재는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정민의 시야에서는 희재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꽤 오래전부터 희재는 표정을 사용하지 않았다. 얼굴 근육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처럼 건조한 희재의 얼굴을 마주 볼 때마다 정민은 그저 사춘기일 거라고 애써 자위하곤 했다.


“내가 고쳐놓을 거야, 반드시.”


다른 임상환자들의 미묘한 표정들은 잘 봤으면서 왜 희재의 것은 읽지 못했을까. 또다시 자책하는 정민의 앞에서 희재는 몸에 붙은 센서들을 모조리 뜯어버리고 연구실을 나갔다. 남은 정민은 모니터의 선들이 일제히 아무 의미 없는 직선으로 변해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강남 한복판의 건물이 무너졌다. 십 수년 전 원자재 값이 폭등했던 시기 철근 개수를 줄였던 부실공사가 원인이었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179명의 사람들이 생을 마감했다. 사람들은 다른 곳도 아닌 강남에서 참사가 일어났다는 것에 경악했다. 내가 일했던 건물인데, 어제 그 앞을 지나갔는데, 건물 소아과에 있던 아이들이, 친구의 친구가⋯. 참사는 진상을 알아갈수록 참혹했고, 참혹한 만큼 많은 음모론이 뒤따랐다. 소란이 사건을 덮어 추모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삶의 가장 잔인한 지점은 마음이 무너졌을 때도 한 없이 굴러가야 한다는 것이다. 제각기 필요한 추모의 시간만큼 삶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허무는 해구와 같아서 깊이를 알 수도 없는 슬픔과 진한 패배감이 끝도 없이 뿜어져 나왔다. 세상을 뒤덮을 것처럼.

이때 베레시트에 참사 희생자들을 만날 수 있는 추모공간이 마련되었다. SNS 데이터를 모아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모습을 게임 속 아바타로 재현해 유가족과 만나는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작은 논란이 있었지만, 저명한 뇌과학자의 공증과 콘텐츠의 디테일, 그리고 무엇보다 유가족들의 지지 덕에 추모 콘텐츠는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추모 공간을 방문하기 위한 유저들로 동시 접속률이 신기록을 경신했다는 건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걸 기획했던 현서만 예외였다. 그 건으로 성과 보고를 하던 날을 현서는 잊지 못했다. 사람들의 슬픔과 애도를 철저히 숫자로 환산하고, 이에 따른 성과를 기쁘게 자랑하던 자신의 모습이 어딘가에 남아 틈이 날 때마다 조금씩 스스로를 잠식시켰다. 딱히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건 알았다. 다만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겠을 뿐.

-이게 대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건가요, 현서 님?

회의실에 접속하자마자 장실장이 무섭게 쏘아붙였다. 뭐가 잘못된 건지 파악할 틈도 주지 않는다는 건 그냥 욕받이가 필요하다는 말과 같았다. 잠자코 앉아있자 박영훈이 말리는 시늉을 하며 나섰다.

-실장님, 이건 연구팀 쪽 이슈입니다. 아무래도 신규 연구이다 보니까 협조를 구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조금 있어서요.

아무래도 박영훈이 연구팀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모양이었다. 현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굳이 현서를 끼워 넣었으면서 중요한 논의에 부르질 않았다. 오늘 회의에서 살짝 시동을 거는 걸 보니 잘 안되면 책임을 떠넘길 준비를 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현서 님이 연구팀이랑 관계를 잘 쌓으신 게 있으니 좀 더 적극적으로 성사시켜 보세요.

분명 설득에 실패한 건 박영훈인데 어쩐지 현서가 혼나고 있는 꼴이었다. 혹시 둘이 사귀나, 싶을 정도로 노골적인 감싸기였다. 순간 머릿속에 배 나온 장실장과 박영환, 둘의 달콤한 애정씬이 떠오르자 의지력을 발휘할 틈도 없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내연애가 제일 재밌는 콘텐츠라지만 이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제발 사실이 아니길 바랄 뿐. 현서는 당황하지 않고 재빠르게 포커페이스 필터를 켰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이 달 안으로 일단락하세요. 안될 건은 빨리빨리 접으셔야지.

제 말이 그 말입니다,라고 말하고픈 욕구를 억누르며 열심히 해보겠다는 말로 회의를 마무리했다. 이렇게 보면 장실장과 현서도 제법 통하는 면이 있는 듯했다. 프로젝트고 뭐고 통째로 날려버리고 빨리 집에나 가고 싶은 마음. 시야 한 구석에 귓속말 알림이 나타났다.

-현서 님 잠깐 따로 이야기 좀 하시죠.

박영훈은 다 같이 있을 때 못할 말이 그렇게나 많은지 늘 회의에서 남겨둔 말로 현서를 따로 불러냈다. 가상 회의실에서 사람들이 다 나가자 일전의 가식적인 표정이 한 꺼풀 벗겨진 박영훈이 남아있었다.

-현서 님이 있어서 진짜 다행이에요. 요즘 너무 바쁘네요.

다짜고짜 맥락도 없는 칭찬으로 시작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급하게 현서를 써먹을 데가 있어 보였다. 이렇게 빤히 속이 보여서야. 순간 연결이 불안정한 지 낯선 기척이 났다.

-다름이 아니라 연구팀이 개괄적인 얘기를 좀 듣고 싶다 해서. 현서 님이 시작하신 프로젝트니까 워낙 잘 아실 거잖아요.

역시나 안 봐도 OTT였다. 미각 패턴에 대한 연구는 생각보다 까다로운 기획이 먼저 필요한 프로젝트였다. 열심히 수집해놔 봤자 연구팀과 의견이 합치되지 않으면 어차피 쓸 데가 없는 데이터였다. 그걸 알았기에 수집에 앞서 미각 연구에 대한 맥락을 공부했다. 콧대 높은 연구팀을 설득하려면 주장하는 바에 대해 그들만큼 알아야 했다. 어느 정도 말이 통하고 프로젝트의 중요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자 자연스레 연구팀에서도 현서를 인정하며 좋은 관계가 맺어졌다. 물론 윗선에서 프로젝트가 잘리면서 다 물거품이 되었지만.

“지금은 박팀장님 프로젝트이기도 하죠. 제가 도울 수 있다면 돕겠지만 그렇게 되면 연구팀에서는 제 프로젝트라고 오해할 것 같은데요.”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고 말하고 싶은 게 진심이지만, 사람이 언제나 솔직할 순 없는 거니까. 박영훈이 말 뜻을 이해한 건지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지며 굳어졌다.

-현서 님, 이런 식으로 하시면 곤란해요. 같은 팀 안에서 밥그릇 싸움 하자는 것도 아니고.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

-혹시 욕심 있으세요?

박영훈이 순간 안색을 바꾸며 공격적으로 쏘아붙였다. 가식적인 모습이 꼴 보기 싫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게 이렇게 날 것의 민낯을 보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본심이 드러난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는 건 정말이지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도 제가 현서 님 좋게 봐서 한 가지 조언드리자면, 장실장이 올라가야 본인한테도 기회가 오는 거예요. 지금 자잘한 경쟁할 때가 아니라 같이 힘껏 장실장을 밀어 올릴 때라고요.

무슨 이런 개 같은 소리가 다 있는지. 순간 면전에 대고 욕이 나올 뻔하는 걸 사회적 지위를 생각해 가까스로 참았다. 물론 돈과 권력을 싫어하는 인간 없다지만 이런 식으로 밖에 발상을 못한다는 게 기가 차는 노릇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어디부터 무어라 반박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저 실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박팀장님 의견은 잘 알겠습니다. 저는 다음 회의가 있어서 이만 나가볼게요.”

한껏 열이 오른 박영훈을 뒤로하고 가상 회의실에서 로그아웃했다. 하여간에 머릿속에 다 자기 잇속 챙길 생각 밖에 없고, 상대도 그게 전부인 줄 아는 사람들만 즐비한 세상이었다. 그 순간 문득 수안이 떠오른 건 우연은 아니었다. 밑도 끝도 없는 힘찬 결의가 느껴지던 눈빛. 어쩌면 수안은 좀 다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서와 같은 중심을 가진 사람일 것만 같아서. 이런 기대는 반드시 실망을 동반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현서는 자리로 돌아와 한동안 열어보지 않았던 데이터 로그를 열어보았다. 유저들을 통해 수집된 음식과 미각에 대한 정보들이 전혀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쌓여있었다. 박영훈에게 넘길 바엔 그냥 폐기해버릴까 싶었지만 생각보다 방대한 양에 마음이 복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단순히 아쉬운 걸 떠나서, 현서가 옳다고 확신했던 방향이었다. 미각까지 완전히 구현되었을 때 비로소 베레시트가 현실 세계를 뛰어넘는 또 다른 현실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걸 검증해 볼 기회까지 같이 폐기해 버리는 것 같아 쉽게 결정이 서질 않았다. 무엇 때문에? 결국 남이 성과를 홀랑 빼앗아가는 게 싫어서라면 그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었다. 맞다고 생각한 일을 내 성과가 아니라는 이유로 하지 않는 건 잘하는 짓인가.

고민 끝에 현서는 인턴들에게 어마어마하게 쌓인 데이터를 정제하는 일을 넘겼다. 어느덧 인턴쉽도 후반부가 되었기에 루틴 한 업무 이외에 새로운 데이터를 다뤄보는 것도 좋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수안도 일이 많으면 한 동안은 현서를 귀찮게 하지 못할 테니까.


현서 자신도 모른 채 무언가를 기대했다는 걸 깨닫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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