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소한 삶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멜리 Jul 16. 2018

마음이 습한 날에는

小訴한 기록14_어떤 순간도 태연하게 넘기는 어른이 될 수는 없나요

 마음이 습한 날이 있다. 날씨가 덥고 푹푹 쪄서가 아니라, 그냥 어쩐지 답답한데 숨이 콱 막히는 날. 그런 날이면 열 번에 네 번쯤 꾸는 꿈이 있다. 8월의 숨 막히는 고3 교실인데, 수리논술 가답안을 연습하는 내 책상 위로 누군가 앞자리의 의자를 올려놓는다. 내가 고개를 들자, “그거 풀어도 너 대학 못가.”라고 얘기하며 옆에 선 친구와 마주 보고 웃는다. 의자를 앞으로 밀어버리고 무시한 채 앉아 마저 답안을 써 내려가고 꿈에서 깬다.


 10년 전쯤의 이맘때였다. 그중 하나는 우리 반 임원이었고 나머지 둘은 나와 등수가 비슷했던 애들이었다. ‘유난’이다 싶었고, ‘유난이다’ 말한 뒤 쓰던 걸 마저 썼다. 나는 그해 원서를 냈던 대학 거의 모두에 붙었고, 그날 나에게 뭔가 타격을 주고 싶어 했던 비슷한 등수의 애들은 수능 직전 갑작스러운 치정 싸움을 하곤 서로 따돌리고 싸우다 수능을 망쳤다 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인과응보의 서사. 


 살면서 이상하고, 무례하고, 경우 없는 순간들을 매우 많이 마주쳤지만, 직접 본 것 중 일등을 꼽자면 단연 그때. 그때보다 역겨운 순간은 없었던 것 같다. 철없고, 어리고, 오로지 대학에 진학하는 일만이 중요한 열아홉 철부지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치졸한 행동.


 다행스럽게도 그때의 나에겐 내가 내 편이라 믿을만한 사람들이 있었고, 내 대신에 혹은 나보다 더 화내 줄 사람들이 있었다.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그랬다면 대학이 인생의 전부같이 느껴지던 열아홉은 절망밖엔 못 했겠지. ‘안 그래도 힘든데, 누가 날 괴롭히잖아? 포기해버리지 뭐.’ 하는 가장 좋은 핑계가 되었을 것이다.


 학교 밖에 나와 4대 보험에 이름을 올리고 나라에 세금을 내며 ‘일’을 하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누군가가 내가 앉아 있는 책상 위에 매일같이 다른 의자를 올려놓는 일의 반복 일지 모른다. 끊임없이 무례하고, 상식 밖이고, 사람이 어쩜 이러나 싶은 순간들의 반복. 물론 내가 이런 사람을 만나다니, 이런 일이 생기다니! 하는 좋은 날도 분명 있지만.


 요즘 부쩍 잘 참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곤 놀란다. 예전엔 무엇 때문에 화가 나거나, 속이 상하더라도 할 일을 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는데, 요즘은 그걸 핑계 삼아 아 몰라, 다 하기 싫어! 외치는 나와 자주 마주한다.

 그때만큼 절실하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정말 갈수록 내 분노의 역치가 낮아지는 걸까. 것도 아니면, 나이를 먹어갈수록 세상에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은 존재하지 않는단 걸 깨닫게 되면서일까.


 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 나의 바깥 점들에 있는 것으로부터 무뎌질 수 있기를. 그때처럼 태연하게 정말 유난이다, 생각하고 쓱 넘기는 어른이었으면. 




이 무더위도, 무례함도, 그리고 무지로부터도.


잘 끓어 넘치는 나 너무 마음에 안 들어....8ㅅ8

매거진의 이전글 지도가 필요한 순간이 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