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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멜리 Jun 04. 2018

지도가 필요한 순간이 오면

小訴한 기록13_어디로든 가게 해주나요

 

 지난주 목요일, 점심을 먹고 들어가는 길에 지도를 파는 트럭을 만났다. 온 사방에 지도를 잔뜩 붙이고, 짐칸 가득 지도를 싣고 있는 낡은 파란 트럭. 걷다말고 멈추어 서서 한참을 기웃거렸다. 서울 지도에서부터 전국지도, 세계 방방 곡곡의 지역도까지. 구글어스만큼의 실시간 정보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이 트럭에 있는 지도로 찾아가지 못할 곳은 지구 상에는 없을 것 같았다.


 교복을 입던 시절, 나는 사회과부도를 제일 좋아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교과목은 국어과목이었지만, 제일 많이 펼쳐봤던 교과서는 '사회과부도'였다. 수업시간엔 막상 몇 번 펼쳐볼 일이 없었던 교재였지만, 나는 틈만 나면 사회과부도를 펼쳤다. 지도 위에 펼쳐진 기호들을 하나하나 읽어 나가는 일도, 도로를 따라 전국 지명을 눈으로 돌아보는 것도 너무 재밌는 일이었다. 부도 과목 뒤에 잔뜩 쓰인 통계치를 읽는 것도 좋아했다. 우리나라는 1km²당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사는데, 호주는 요만큼 밖에 안 살잖아? 강수량이 이거밖에 안 되는 곳에서 살 수 있나? 하는 질문들을 떠올리고, 또 답을 찾기 위해 앞 페이지의 지도를 펼쳐봤다가, 또 뒤에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가. 팔락팔락 하루 종일 열심히도 읽어댔었다.


 야자시간 틈틈이 지도를 펼쳐대던 나를 보고 친구들은 내가 여행작가라도 되려는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자라고 보니 나는 지도 읽기만좋아할 뿐, 활동적이진 못한 사람이었다. 스스로도 매우 뜻밖이었다. 학생 때는 수험생이라는 신분 탓에 원하는 곳은 있지만 물리적으로 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나는 별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여행을 가면 기분은 좋다. 가끔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갔다 오면 꽤나 큰 만족감에 감상을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딱 그뿐. 그 시절, 밤낮으로 지도를 펼쳐봤던 열정은 어디에서 왔던 걸까 싶을 정도로, 20대가 되고 나서는 그 흔한 여행서적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럼 여행이 가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지도에 목을 맸을까. 지도만 바라보고 살던 시절엔 몰랐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나에게 있어서 지도는 새로운 지역에 대한 탐구나, 여행의 도구가 아니었다. 내게 있어서 '지도'는 지역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경로'를 보여주는 도구였다. "여기엔 뭐가 있네?"가 아니라, "여기서는 어떻게 가야 하지", "여기까지 어떻게 가야 하지"가 포인트였다.  지금도 나는 어딘가에 갈 일이 생기면 늘 지도부터 꺼내 본다. 요즘은 어플이 워낙 잘 되어 있으니까, 지도앱으로. 아마 내가 메신저 앱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어플이 아닐까 싶다. 내가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를 지나 어디에 도착할 수 있을지가 너무 궁금하니까.


 그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에도, 나는 지도를 그린다. 엑스 마인더로 마인드 맵을 그리기도 하고, 줄글로 마음을 정리하기도 하고, 핸드폰에다가 대충 메모를 남기기도 하면서 조금씩 경로를 잡아간다. 스팟을 찍어서 큰 선을 완성하듯이. 어떤 것은 명쾌하게 그려지지만, 또 어떤 것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서 찍어도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생각해보면, 어디까지 가겠다고 열심히 지도를 체크해 놓기만 하면 그곳에 도달하리라는 생각 자체가 오만일지 모른다. 실시간으로 도로교통상황을 알려주는 네비를 켜놓고 운전을 해도 잠시 잠깐 삐끗하면 다른 도로 위를 달리게 되곤 하니까.


 그래도 열심히 지도를 들여다본 덕에 어디를 가더라도, 낯선 곳이더라도, 혼자 있더라도 열심히 뽈뽈거리고 잘 돌아다닌다. 내게 있어 지도는 앞날에 대한 어음 같은 것이다. 뭐 어쩌면 부도가 날지도 모르지만, 발행하는 순간만큼은 돌아올 보상과 도달할 위치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찬 그런 것. 내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내 지도를 그릴 줄 아는 눈과, 도달하리라는 믿음, 그리고 설령 그곳에 도착하지 못하더라도 내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할 노력이다.


 바깥 날씨가 파랗다. 가을의 청명과는 또 다른 여름의 청량한 파랑으로 가득 찬 날씨. 여기저기 담벼락마다 빨간 장미가 한창이다. 요즘의 나는 노란 맹인 보도블록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이 있다. 블록을 더듬어 가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에선가 블록들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여름이 오면 으레 더울 수밖에 없듯, 헤매는 날이 오면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겨우 초입에 들어선 여름이지만, 또 잠깐 더위에 절어있다 보면 금세 가을이 올 것이다. 바깥에도, 그리고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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