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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소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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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멜리 Aug 09. 2018

반려나무를 아시나요

 세상은 늘 변한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변하고, 환경이 바뀌고, 방법도 달라진다. 농업혁명이 그랬고, 산업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혁명'이라 이름 붙인 것들은 특히나 급격하게 사는 모습을 뒤집어엎고 간다. 그렇다면 요즘 사람들 간의, 또 사회 여러 지점들 사이의 관계 변화는 무슨 혁명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관계 혁명이라고 불러야 할까?


 인간은 수천 년의 시간 동안 무리 생활을 지속해 왔다. 가장 큰 이유는 생존하기 위해서였으며, 어느 시점 이상부터는 단순한 물리적 생존 이상의 정신적 생존을 위해 공동체를 꾸려 '함께' 살아왔다. 그랬던 인간들이 언제부턴가 하나둘씩 자기만의 세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홀로, 혼자, 하나, 일 인분, 일인용 같은 단어들은 더 이상 '외로움'이나 '고독'의 상징이라 할 수 없다. 그 자체로 하나의 생활 패턴이 되었다.


 함께 사는 삶, 복닥복닥 시끄러운 대가족, 많은 형제자매, 더 큰 인간관계는 점차 비주류가 되어간다. 나만 봐도 알 수 있다. 90년대 초반에 태어난 나는 형제 없는 외동으로 자랐는데, 내가 자랄 때만 해도 외동은 드물었고 외동이라 외롭겠다, 외동은 사회성이 부족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외동은 이기적이기 쉬우니 신경 써라 같은 말들을 많이 듣고 자랐다. 하지만 요즘 부부들은 대부분 한 명의 자녀만 낳거나, 혹은 아예 아이를 갖지 않는 경우가 많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결혼을 해야 한다 생각했었던 사회 분위기도 많이 바뀌어서 '미혼'이 아닌 선택적 '비혼'을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고, 자녀를 다 키운 후의 부부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졸혼' 문화도 생겨났다.


 왜 우리는 다시금 혼자가 되기를 선택하는 걸까. 왜 우리는 기존에 '고립'이라 여겨졌던 행위들을 스스로 하고 있는 걸까. 어느 단 한 가지 요인이 발단이라고는 할 수 없다. 경제적인 부담감, 사회적인 피로도, 개인적인 매몰 감과 같은 다양한 이유들이 개인을 '혼자'가 편하게끔 만든다. 부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기술이나 인프라 발전 같은 긍정적인 측면들도 혼자 해도 편안한 삶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고 있으니 '혼자'하는 삶을 꼭 문제 상황으로부터의 도피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나 역시 '무리'보다는 '혼자' 혹은 '소수'가 편하다 여기는 사람이 되었다. '되었다.' 일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일지에는 약간 고민이 인다. 과거의 나는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거나,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일을 내 스스로 좋아한다 생각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아닌 것 같다, 이 말이다. 내 취향이나 선호가 아니라,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런 사람을 좋은 사람, 좋은 인간관계를 가진 사람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나 역시 그 평가 기준에 맞춘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혼자 있거나 한두 명의 친구와 함께 있는 조용하고 고요한 순간의 편안함을 인지한 뒤부터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주는 피곤함을 더 크게 느끼게 됐다.


 그러면서 부가적으로 따라온 것이 바로 '집순이'의 삶. 그 전엔 쉬는 날이면 어디든 나가 공연이나 전시를 보고, 외식을 하고, 드라이브도 해야 휴식을 알차게 쓴 것 같았다. 이젠 집에서 하루 종일 뒹굴고, 읽고 싶던 책을 읽고, 혼자 커피를 내려 마시고, 이미 영화관에선 내려진 지 오래인 영화를 부분 부분 끊었다가, 돌렸다가 하기를 반복하며 감상하는 일이 더 행복한 집순이가 되었다. 가끔 편한 친구를 만나기 위해선 기꺼이 집 바깥으로 나가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관계의 유지'만이 목적인 만남은 거의 갖지 않는다.


 딱히 '외롭다'라고 느낀 순간은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감정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인 건지, 자꾸만 뭔가 집안에 들이고 싶어 지기 시작했다. 길가다가 눈만 마주쳐도 좋아 어쩔 줄 모르는 강아지나 고양이가 고려 대상의 1순위였으나, 곧 저 먼 일로 미뤄졌다. 일하느라 평일엔 거의 집에 있지 않는 나와 함께 사는 강아지나 고양이는 절대 행복하지 않을 테니까. 그다음은 햄스터였다. 24시간 애정을 주지 않더라도 하루의 일정 시간 들여다봐주고 케어하면 된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그런데 수명이 2년을 넘기기 어렵단다. 나와의 만남부터 고작 2년의 시간이라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거북이도 찾아보고, 물고기도 찾아봤다. 하지만 결국, 나는 아직 혼자 지내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를 케어하면서 지낼 정도의 수준은 못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반려나무가 담겨있던 패키지 박스. 글씨체도 나무를 형상화 했다. 귀엽다.


 그러다가 어느 날 텀블벅을 통해 '반려 나무'를 알게 됐다. 처음엔 아무 데나 다 '반려'를 붙이네, 생각하며 클릭했다. 내가 나무가 심어진 화분 하나를 사면, 같은 나무가 숲이 필요한 곳에 한 그루 똑같이 심어진다고 했다. 사막화, 지구온난화 등의 자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숲 재생 프로젝트 차원이었다. 그런 의미라면 나와 화분 간의 1:1 반려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자연 간의 공생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후원을 했었는데, 어제저녁에 내가 참여했던 프로젝트가 완료되어 화분이 도착했다. 어디서든 잘 자란다는 사철나무. 한 손으로도 거뜬하게 들리는 화분 속에 담긴 나무 한 그루가 우리 집에 추가됐다.


 딱히 별 생각은 없었는데, 막상 배송 온 화분을 보니 잘 키워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종종 화분이나 꽃을 선물로 받곤 했지만, 늘 '어떻게 간수하나'가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었는데 어제 도착한 화분에겐 '너를 잘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의아했다. 아무래도 같이 따라온 패키지들 때문일까. 엄마 아빠 저 왔어요! 하며 도착한 반려 화분의 소개 문구는 귀엽기도, 조금 오버스럽기도 했지만 어쨌든 분명 내 마음을 조금 바꿔 놓았다. 물 주는 날을 꼼꼼히 체크하고, 창가 옆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 이름을 지어주라고 적혀있기에 고민 끝에 이름도 지어주었다.

귀여운 패키지와 함께 도착.


 나는 아직 '반려'라는 말이 부담스럽다. 용기가 없다고 해야 할까. 평생을 나눠 갖게 될 '사람'에 대한 감정은 아예 생각조차 나지 않고, 선택지로 올라오는 '강아지'나 '고양이'같은 생명체들은 아직 내겐 너무 어렵다. 함께 할 때에 내가 온전히 보호해 주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고, 나보다 먼저 떠나는 것이 거의 확실하기에 있지도 않은 반려동물의 죽음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직 내가 온전히 무언가를 책임질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소리겠지. '그릇' 따지다간 아무것도 못한다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에게 반려라는 단어는 조금 무거운 말임이 사실이다.


창가 옆에 자리를 잡아 줬다. 햇빛보게 커튼을 젖혀주고 나온다는 것이 깜빡했다.T_T...


 새로 온 화분을 반려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집에 휴지가 몇 개나 남았는지, 냉장고에 생수는 몇 병이나 들어 있는지 처럼 체크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추가되었을 뿐. 다만, 냉장고에 생수가 없어 불편을 느끼는 건 나지만 내가 물을 제때 주지 못해 말라 가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지.


 안녕 내 사철나무, 다음 봄이 오면 꼭 분갈이를 해줄게. 오래오래 살아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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