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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멜리 May 15. 2017

현대와 일상성

小訴한 기록2_현대와 일상성

 현대는 ‘다양한 시각이 공존하는 세상’이라 말할 수 있다. 이때의 다양한 시각이란 단순히 ‘일방향에서 특정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사고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관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정 관점에 의한 전체화나 집단화는 과거에 있어서는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의문을 갖고, 개인 각자가 능동성과 주체성을 가지고 고유한 관점을 보유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현대의 발현이 시작되었다.

 한국사에서 ‘판소리’라는 장르는 17세기 전후에 등장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 기원이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최초의 기록인 <만화본춘향전(晩華本春香傳)>과 당시 시대상황 등으로 말미암아 숙종(1661~1720) 무렵 평민 문화의 확산과 더불어 생겨났다고 본다. 판소리가 등장한 17세기는 역사적으로 ‘현대’로 분류할 수 없는 시기이나, 판소리 자체만큼은 극적 구성과 연행방법에서 충분히 ‘현대’에 대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궁중 음악이었던 정악이나 아악과 비교했을 때 판이하게 다른 구성 방식과 연행 방법에서 현대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작자미상의 <모흥갑 판소리도>라는 그림에서 당시 판소리 무대 구성 방식을 엿볼 수 있는데, 중앙에 명창과 고수가 위치하고 관객들이 사방을 둘러싼 형태로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비슷한 시기 유럽의 공연 방식과도 상이한 형태를 보이는데 서양음악의 경우에는 지정된 무대를 기준으로 무대와 객석이 분리되어 서로 마주보는 고정적인 형태로 공연되었다. 또한 서양극에서는 무대가 객석보다 위로 도드라져 올라와 그것이 ‘무대’라는 구분된 장소임을 부각시키는 것과 달리, 판소리는 단지 멍석이나 자리를 깔고 그 위에 서서 공연을 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서양극에 층위가 있다면, 판소리에는 평면적 형태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판소리가 스스로의 구성요소에 ‘청중’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판소리를 두고 ‘일고수, 이명창, 삼청중’이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고수와 명창, 그리고 청중이 존재해야 비로소 판소리가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곧 어느 한 부분에 중심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극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중심이 되어 함께 참여한다는 개방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평민들, 곧 속세가 만들어낸 문화인 판소리는 조선사회 후기로 접어들면서 상류층의 문화를 흡수하며 발전해 나갔다. 이는 판소리가 다양한 관점을 차용하고, 고수와 명창의 소리뿐만 아니라 관객의 소리까지 자신의 것으로 융화해 냈기 때문이었다. 한명의 주인공이 등장해 극을 휘젓는 것이 아니라, 극을 구성하는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것이 바로 판소리였다. 그리고 이는 근현대로의 문화발전시기를 이끄는 한 요소가 되었다.

 판소리에서 극중 배경으로 설정되는 사건 공간은 대개 연행 당시의 생활현실이거나 그에 대한 우화적 투영으로 나타난다. 등장인물들 또한 시대 현실상을 반영하는 특정적 존재로 나타난다.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우월한 능력을 갖춘 선인이라 할지라도 완벽한 영웅으로 묘사되지 않고 추앙과 동시에 풍자와 희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인물이라 하여 철저하게 악행만을 부각시킨 것이 아니라 악행의 배경과 사연 등을 삽입하여 일종의 변명을 덧붙여 주는 형태를 취했다. 일반적인 고전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평면적 성격을 가지는 것과, 그들에 대한 평가가 일면적이라는 점에서 매우 발전된 형태를 지니고 있음이 드러난다. 또한 판소리의 인기 상승에 따라 다양한 레퍼토리의 구축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평민층의 인물들이 판소리 사설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만한 점이다.

 개인의 일상 역시 판소리 사설의 등장인물들처럼 하나의 특정 관점으로 해석될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는 현대인들이 개인의 일상을 외부로부터 침해받지 않아야 하고, 자신 스스로 방향성을 가치고 개척해 나가야 할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흔히 일상성이란 ‘성(聖)스러운 것’과 대조되는 ‘속세(俗世)적인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우리는 과연 ‘속세’를 부정적인 요소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오히려 속세는 판소리와 같이 모두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문화 창조를 이끌어 냈다. 일상성이란 개인이 일상이라는 속세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실존의 양식이며 이때 개인에 의해 규정되는 삶의 방식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무의미하게 보내는 평균적인 삶을 일상성이라 보고 이를 극복하여 본래성을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본래성이란 하이데거가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얻어야 하는 궁극적 해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현대성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하이데거의 주장이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추구해야할 궁극적 해답이라는 결정은 과연 누가 내릴 수 있는가? 절대적 가치, 즉 ‘그렇게 보아야만 할’ 절대적 시각이 존재하던 현대 이전에는 그러한 논리가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개인의 삶의 방향성에 대한 측면에서 만큼은 적어도 더 이상 절대적 시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개개인의 관점과 기호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 인식됨과 동시에 인정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판소리에서는 무대의 범위가 청중에게 까지 확장되었고, 따라서 청중의 감정이 ‘추임새’의 형태로 극의 흐름을 함께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마치 주체성의 범주가 전체 대중에게로 확장 되면서 개인의 능동적 현실 구축 의지가 담긴 삶이 나타난 것과 유사한 양상이다. 이 때 개인이 살아가는 삶과 그 삶의 양상이 바로 일상을 형성 해 내는 것이다. 이때의 일상은 더 이상 매몰되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닌 자신의 삶에 대한 능동적 표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개인의 각기 다른 가치관 아래에서 삶은 과거보다 훨씬 더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고 있다. 때문에 각자의 일상이 저마다의 중요도를 가지고, 저마다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그것은 규정되지 못한 방임적 상태가 아니라, 제각기 자유의 범주 내에서 존재 가능한 의미와 규정성을 가진 개체들이다. 모두 독립적으로 존재하나, 일상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어 불리기도 하며 더 나은 일상이나 더 나쁜 일상은 없다. 그것은 그저 일상일 뿐이며, 생활방식으로써 표현되는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이다.

 현대적 가치관 하에서 일상성은 더 이상 하이데거의 정의처럼 부정적인 존재가 아니다. 현대에서 개인이 경계해야할 진정한 일상성의 문제는 오히려 하이데거가 말했던 것처럼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개인의 일상이란 개개인의 가치 다양성 확립과 함께 보장된 개인의 순수 자유 영역이다. 수많은 양상으로 구현될 가능성을 지닌 일상이 하나의 단일한 가치로 향해 간다는 것은 외려 현대적 의미의 일상에 역행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대중이 지향해야 하는 것은 사회적 허용 범위 내에서의 다양한 일상 형태의 발현과 개인적 성찰에 의한 일상의 발전이지, 단일한 지향점으로의 회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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