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런 아이였다. 지금은 어디로 갔을지 모를 그런 아이.
며칠 전 아침 4호선이 멈춰 섰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로 이사하면서 오랜 시간 지하철을 타지 않고도 출퇴근을 할 수 있게 된 나에겐 조금 먼 얘기지만, 지하철 등하교와 출퇴근의 고통을 오랜 시간 겪어보았기에 마냥 남일 같지 않았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인천에서 더 오랜 시간을 산 나에게 지하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내가 타 본 모든 운송 수단 중에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 인천에서 서울로 대학교를 다녔던 5년여, 또 출퇴근을 했었던 2년여의 시간들. 주말을 제외하더라도 따져보면 매번 적어도 3시간씩 약 2000일 정도를 탄 셈이니 6000시간 정도를 지하철에서 보낸 것이다.
내게 첫 기억으로 남겨진 지하철 역은 잠실역이다. 세 살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다. 당시 집안 상황상 아빠와 떨어져 살게 되었는데, 아주 오랜만에 아빠를 만났다. 잠실역 지하 역사 안이었다. 물품보관함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역사 복도였는데, 아빠가 달려와서 울먹이는 손으로 나를 안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제 갈길 가기 바쁜 사람들의 뒷모습이 가득한 그 풍경 속에 내 뒤통수를 감싸 쥐는 아빠의 큰 손이 아직도 내 기억 한편에 남아 있다.
다섯 살 무렵, 서울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우리 집은 당시 백운역에서 가까웠는데, 옆에 아주 큰 폭포가 딸린 관광호텔이 하나 있었다. 지금의 백운역사와는 다르게 90년대 중반의 백운역은 정말 허름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역사의 위치보다 좀 더 부평역 쪽에 가까운 곳에 위치했었는데, 아마 그 당시가 신역사를 공사하는 중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빨간 천막 같은 것으로 덮인 계단을 내려가면 저 앞으로 백운고가와 관광호텔의 폭포가 보였다. 그땐 그 폭포가 진짜인 줄만 알았는데, 좀 더 자라고 보니 플라스틱 따위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인공 폭포였다. 어릴 땐 그 폭포가 너무 시원하고 예뻐 보였는데, 다 커서 보니 깨진 인공 조형물 사이로 보이는 페인트 자국은 그저 흉물스러웠다. 지금은 망해버린 그 호텔은 무슨 직업학교 같은 것이 되었다.
집은 인천으로 이사를 왔지만 엄마는 계속 서울에서 일을 했다. 유치원이 방학을 하거나, 사정이 있어 쉬어야 하는 날이면 엄마 직장에 따라가곤 했다. 아빠가 크게 교통사고를 당한 뒤로 차를 한 번도 사지 않았던 우리 집의 자가용은 항상 지하철이었다. 그 당시 엄마의 직장은 신천역에 있었고, 엄마와 함께 신도림에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몇 번 같이 가 본 경험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날씨가 너무 추웠고 엄마는 날이 추우니 따라오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했다. 혼자 집에 앉아 티브이도 보고, 책도 보고, 밥도 차려 먹었는데 도무지 시간이 가질 않았다. 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그날따라 번뜩 엄마를 데리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작 여섯 살이었는데. 96년의 겨울, 나는 혼자 지하철을 타러 나갔다. 큰 신호등을 건너고, 골목길을 지나 백운역에 갔다.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이라 표를 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개찰구 안전바 밑을 통과해 지나갔다.
1호선을 타고 신도림 역에 가서, 지하로 내려가 2호선을 갈아탔다. 방향이 헷갈렸지만 엄마가 늘 '잠실'이라고 적힌 방향에서 탔기 때문에 열차를 제대로 찾을 수 있었다. 지하철 노선도를 한참이나 들여다 보고, 지금은 잠실 새내 역이 된 당시의 신천역까지 몇 정거장인지 여러 번 확인해서 세어 봤다. 그리고 노선도가 잘 보이는 자리가 나기를 기다렸다가 옮겨 앉았다. 방송을 못 들으면 내릴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이 있었나 보다.
신천역에 도착하기 전에 삼성과 종합운동장을 지난다는 것을 기억했다가 삼성역에서 문이 열렸다 닫히자마자 문 앞에 가서 섰다. 무사히 신천역에 내려서는 매번 나갔던 방향의 출구를 찾아 올라갔다. 올라가면 바로 시장길 비슷한 풍경이 보여야 하는데, 보여야 하는데 하는 마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다행히 낯익은 가게들이 보였다. 그곳에서도 한참을 걸어 엄마의 직장을 찾아갔다. 엄마의 직장은 바로 앞에 큰 공원이 하나 있었는데, 막상 도착하니까 엄마한테 어쩐지 혼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공원 그네에 가 앉았다.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갑자기 건물 2층 창문이 벌컥 열리고 엄마 얼굴이 튀어나왔다. 엄마였다. 엄마! 하고 불렀는데, 엄마도 먼저 나를 봤나 보다. 놀란 표정으로 엄마도 내 이름을 불렀다.
집에 혼자 있는 내가 걱정이 되어서 몇 번씩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내가 전화를 받질 않았다고 했다. 당연히 나는 지하철을 타고 엄마한테 가는 중이었으니까..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었는데, 거짓말 같이 내가 그네에 앉아 있었다고 했다. 혼이 날 줄 알았는데, 엄마는 의외로 크게 꾸짖지 않았다. 어떻게 왔는지 나의 경로만 재차 물을 뿐. 엄마는 오히려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혼자 찾아온 여섯 살짜리 딸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도, 그때의 엄마도 정말이지 문제가 많은 모녀였다. 나는 줄 곧 '나는 어른', '내가 못하는 건 없어'라고 생각해 왔으니까, 그리고 그렇다 해도 어색할 게 없는 사고가 덜 자란 어린아이였으니 그렇다 치자. 그런데 엄마마저 그 상황을 너무 긍정적으로만 인식했으니 분명 문제가 단단히 있었다. 겁도 없이, 요즘 같으면 벌써 아이가 없어지거나 큰일이 나고도 남았을 일이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발칙한 어린아이였고, 어처구니없을 만큼 무모한 엄마였다. 용감했던 엄마도 이젠 나이가 들어 겁이 많아졌고, 어쩌면 엄마 눈엔 오히려 지금의 내가 더 어린아이 같아 보일지도 모른다.
요즘의 나는 어떨까. 요즘의 내가 이토록 무모한 행동을 해 본 일이 언제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무모했지만 용감했고, 어리석었지만 과감할 줄 아는 생각도 행동도 최근엔 해 본적이 거의 없다. 매일 따지고, 계산하고, 확인하고, 또 더블체크하는 것이 더 나답다. 그러면서 얻은 것들도 이룬 것들도 많지만, 분명 잃은 것도 많다. 무조건적인 자신감, 나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 바깥에서 오는 것들이 가져다주는 새로움과 같은 부분들이 내게서 차츰 옅어져 간다.
쉽지만은 않은 요즘. 여섯 살의 내가 필요한 순간들이 종종 나를 찾아온다. 1m도 채 되지 않았을 작은 여섯 살의 나. 하지만 혼자 서른 개의 역을 지나 엄마를 찾아갔던 그 날처럼. 오늘의 나도 그렇게 무모하게 하지만 과감하게 내 목적지에 도달할 힘이,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그때보다 족히 네 뼘은 더 자랐고, 이젠 엄마가 목적지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은 어른이 됐는데 오히려 그때보다 어려워진 건 왜일까. 안녕, 어디 갔니 나의 여섯 살. 너무 오래 부재중인 여섯 살 나에게 이제 돌아올 때가 되었다고 누가 좀 전해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