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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정 Oct 12. 2022

외상은 없습니다


 부모님의 이혼 후, 당연히 엄마랑 살게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다. 이혼하자는 엄마의 말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아빠는 여러 방식으로 엄마를 압박해왔는데, 그중 아빠가 가장 원한 것은 나를 엄마에게서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당시에 나는 엄마와 함께 머물렀는데, 아빠는 몇 번이고 아빠가 있는 지역으로 올 것을 권했지만 나는 매번 거절했다. 나의 거절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아빠에게 가면 엄마랑 다시는 함께 살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던 게 하나였고, 또 다른 하나는 나 역시 아빠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아슬아슬 줄 타기의 연속이었다. 동생은 아빠의 감정에 더 닿아있는지 멀리 기숙사에 살면서도 매일같이 엄마에게 전화해 욕을 퍼붓기 일쑤였고,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는 날에는 음성메시지로 험한 소리들을 녹음해두는 방식으로 출처를 알 수 없는 화를 쏟아냈다. 엄마의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저 엄마는 자신의 삶을 되찾기를 바랐을 뿐인데 아빠와 동생은 그걸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사실 그때의 나는 그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굳이 이혼을 하겠다는 엄마, 분명 나와 같은 유년기를 보냈는데 엄마만 참으면 해결될 일을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드냐며 화를 내는 동생, 그리고 결혼생활 내내 부정행위를 했음에도 이혼은 할 수 없다고 협박도 서슴지 않는 아빠까지 모두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중재자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던 중에 정말로 엄마의 안전을 걱정해야 할 만한 몇 가지 사건이 있었고, 나는 결국 아빠에게 가기로 결정했다. 조건은 하나였다. 내가 기르던 강아지도 함께 갈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렇게 강아지를 데리고 엄마의 집에서 나왔다.


 엄마만큼이나 나도 아빠가 두려웠다. 엄마를 언제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고, 어떤 날은 내가 살아낼 수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아빠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나였다. 아빠가 원하는 대로 내가 엄마에게서 떨어져야만 아빠가 멈출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혼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아빠는 ‘배신’이라고 여긴 엄마의 이혼선언에 자식을 모두 엄마에게서 떼어놓는 것으로 복수를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때는 아빠와 한 공간에서 지냈는데, 아빠는 내게 걸려오는 모든 전화나 메시지를 엄마와 연락하는 것이라고 여겨 매번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아빠가 두려웠다.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움츠러들곤 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니라고 하는 것 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나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한 달이 넘도록 하혈을 했다. 병원에 가고 싶다는 내게 네가 아픈 게 내 탓이냐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던 그때의 아빠를 여전히 잊지 못한다. 결국에는 내가 내 목숨을 갈아 넣어 엄마와 아빠가 이혼을 하게 되는 거라는 생각을 매일같이 했다. 매 순간 피하고 싶었지만 모두가 위태로웠기에 내가 피하면 그 피해는 엄마가 고스란히 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그날은 친구와의 약속이 있어 짧은 통화를 했는데, 아빠는 엄마와 몰래 통화를 했다고 생각을 하고는 그날따라 유난히 심한 말을 하며 나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아빠에게 맞서 이야기를 했다. 엄마랑 통화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엄마랑 통화를 했다고 해도 내가 엄마랑 연락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 나한테는 모두가 가족이라고. 아빠도 엄마도 동생도 나에게는 모두 아픈 손가락이고 나는 엄마랑 아빠가 이혼을 한다고 해서 천륜을 끊어가며 엄마를 끊어낼 수 없다고.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 한마디 말도 섞지 않고 며칠이 지났고 아빠는 내게 엄마에게 가라고 말했다. 나는 물건처럼 이리 옮겨지고 저리 옮겨지다 필요가 없어지면 버려지기도 하는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결국에 나는 몇 개월 동안 동생과 아빠가 둘이 생활할 수 있도록 이사를 하고, 짐 정리까지 한 후에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모두 해놓고 엄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엄마를 떠날 때와 같았다. 트렁크 하나, 그리고 강아지 한 마리. 당연히 엄마와 같이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엄마가 있는 곳으로 간다는 말에 엄마가 난색을 표했다. 내가 아빠에게 가 있는 동안 엄마에겐 함께 사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오갈 데가 없어졌다. 아빠도, 엄마도 나를 원하지 않았다. 아빠는 경제적으로 넉넉했지만 엄마에게 가는 내게 금전적인 도움을 줄 리 만무했다. 강아지와 둘이 갈 곳이 없어 친구네로 향했다. 거기서도 오래 신세를 질 수 없으니 어떻게든 집을 구해 나왔어야 했다. 모아둔 돈을 계산해보니 작은 아파트를 얻어 한 달 월세를 낼 만큼이었다. 금요일에 친구네 집으로 갔고, 주말 내내 집을 보러 다니고 월요일에 입주를 했으니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이 진행된 셈이다. 지금이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을 그때는 어떻게 했는지 아직도 모를 일이다. 이사랄 것도 없이 짐이라고는 트렁크 하나가 다 였고, 식구라고는 강아지 한 마리가 다 였으니 텅 빈 아파트에 들어가 강아지를 끌어안고 현관에 하염없이 앉아있었던 기억이 있다. 






 슬픔이나 설움, 억울함 같은 감정들은 내가 덮어둔다고 해서 생략하고 지나갈 수 있는 속성의 것들이 아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 번은 마주하게 되는데, 화들짝 놀라 다시 덮어두었다가 훗 날 마주하게 될지, 마주 한 때에 들여다보고 해결을 할지는 내 선택이다. 그때의 독립이 그랬다.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독립을 했고, 당장에 돈을 벌어야 해서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일을 했다. 먹을 게 없어 라면 한 봉으로 며칠을 지내기도 했고, 굶으면서도 말 못 하는 강아지의 사료는 떨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 사료와 패드를 넘치게 사서 쌓아두고는 했다. 유난히 잔병치레가 많던 강아지가 열이라도 나던 밤이면 응급실 데려갈 엄두조차 나지 않아 밤새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아내다 날이 새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가던 날이 셀 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정서적으로 나를 지지해주던 친구가 몇 있었고, 내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반쯤은 주변의 도움으로, 나머지 반은 (우스갯소리지만) 우주의 기운으로 살았다. 그런 생활중에도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말을 걸기를 멈추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때의 감정이 너무 무거워 어떻게든 흩어버리지 않으면 매몰되어 더 살아 낼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극단으로 치닫는 일은 꽤나 자주 있는 일이었기에 살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극단으로 가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조절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내게는 책임을 져야 하는 강아지가 있었다. 그때의 내게는 유일한 가족이었던 흰 강아지는 내가 밥을 주어야 먹을 수 있고, 내가 데리고 나가야 산책을 할 수 있었다. 내 손에 강아지의 삶의 질이 달려 있었다. 나는 버림받았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 강아지를 끝까지 책임질 거야. 매일같이 다짐을 했다. 강아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나도 살아야지. 또다시 죽을 결심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내 강아지가 떠난 후 여야지. 지금은 밥도 챙겨주고 산책도 가야지.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리고 그걸 실행하기 위해선 내 마음과 기분을 조절할 수 있어야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늘 한숨부터 터져 나왔다. 새로운 하루가 또 와버렸다는 것이 그렇게 절망스러울 수 없었지만 그때마다 내 옆구리에 엉덩이를 대고 잠들어있는 강아지의 보드라운 털을 만지는 것으로 하루치의 힘을 얻었다. 긴 계획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놓인 하루만 살아낼 수 있으면 그걸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을 마치고 늦은 밤에 귀가하면 나는 매일 같이 유니폼을 손으로 빨았다. 그리고 유니폼을 빨면서, 매일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기분은 어때? 
요즘 잘하고 있는 것 같아?
출근길에는 왜 울었어? 뭐가 그렇게 갑자기 싫었을까?
왜 갑자기 화가 났던 걸까? 다 그만두고 싶던 마음이 이제는 괜찮아? 
여전히 모두가 다 싫어?



 손빨래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일을 살게 하기 위해 오늘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지만 정성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빨래를 하는 일은 단순노동이라 행위에 집중하다 보면 스스로에게 가볍게 던지는 질문에 무너지지 않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상처가 났는지, 기분이 나쁜지도 모른 채로 충동적으로 행동할 때가 있는데, 그걸 최대한 방지하기 위함으로는 꽤나 효과가 있는 일이었다. 나는 폭풍처럼 밀려드는 감정들을 외면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만 처리하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흘려보내고자 했다.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 그때 느끼는 화나 설움, 억울함, 슬픔들을 어느 정도는 적절히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이, 켜켜이 쌓인 상처라는 것이 어떻게 늘 그렇게 말끔하게 털어질까. 여전히도 나는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어느 날은 십 년 전 했어야 하는 질문들을 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이십 년 전에 돌봐야 했던 마음을 꺼내어 묻기도 한다. 외면한다고 없는 일이 되지 않고 결국에는 갚아야 하는 외상값처럼 어린 나에게 빚진 마음들을 꺼내어 닦고 어루만지는 일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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