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데이트 1위에 등극하셨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 친구들과 맥주 한 잔을 하고 있을 때였다. 동갑내기 친구들 다섯이 모였으니, 자연스럽게 주제는 연애로 흘러갔다. 미국에 있다는 연인과의 장거리 연애를 마치고 부지런히 싱가포르 연인을 찾은 한 친구가 물었다.
"싱가포르에서 했던 데이트 중 최악의 데이트는 어땠어?"
술을 꽤 한 상태였지만 어렵지 않게 생각해낼 수 있었다. 그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는 작년 8월 2일 금요일이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 인터뷰가 잡혀 홍콩에서 급하게 날아온 날이었기 때문에 날짜도 기억난다. 싱가포르가 아니라 그냥 인생을 통틀어 최악의 데이트로 꼽을 수 있는 케이스다.
그는 친구의 남사친이었다. 싱가포르에서 홍콩으로 건너온 이 친구가 우연히 나와 찍은 사진을 그에게 공유했는데 마음에 들어했다는 것이다. 친구는 그를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칭하며, 싱가포르에 갈 일이 있으면 꼭 만나고 오라고 했다. 전화찬스까지 써가며 나에게 어필을 했지만 사실 그냥 그랬다. 백인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생김새의 동양인만 선호하는 나에게는 끌리지 않는 만남이었다. EU 외교관으로 싱가포르에 나와있다는 그의 경력은 흥미롭지만 그게 다였다. 서로의 존재를 잊을 무렵 마침 내가 싱가포르로 올 일이 생겼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는 내 번호를 받아 연락을 주었다.
외교관, 그것도 유럽 연합국을 대표해 왔다니 흥미로운 사람이겠다 싶어 일단 만났다. 그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헤어질 때까지 막장이었다. 초행길인 나에게 쉽게 찾기 힘든 국립박물관 앞으로 오라고 한 그는, 2시간 내내 싱가포르를 보여준답시고 돌아다니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기 급급했다. 저녁에 만났지만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게 다였으면 최악은 아니었을 것이다.
" 너 이름이 발음하기 어려우니 김치라고 부를게."
이때 알아봤어야 했다. 이 사람이 또라이 중 상또라이임을. 나는 심지어 영어 이름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보통내기가 아님을 짐작하여 바로 받아쳤다.
" 한국은 김치라도 있지 체코는 뭐 유명한 음식도 없으니 너는 닉네임으로 쓸만한 것도 없네?"
여기까지는 그냥 웃으며 탐색하는 수준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가관이었다. 그다음 주제는 '아시아 여자 순위'였다. 이는 그가 만났던 일본, 대만, 한국, 동남아 여자들을 평가하여 나라별로 순위를 매긴 것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대만 - 일본 - 한국 - 동남아 순으로 여성 호감도를 평가할 수 있겠다. 대만 여자는 다 좋은데 속옷이 너무 후줄근하고, 한국 여자는 전반적으로 괜찮은데 결혼을 빨리 하고 싶어 해서 별로라고 하였다. 하지만 아시아권 여자들은 백인이면 다 난리여서 자기는 골라서 만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나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나의 몸매, 영어 수준, 지적 수준 등을 평가하며 자기가 만나줄 수 있는 수준이라고 결론을 지으셨다. 의심할 것도 없이 단단히 잘못 걸렸음을 직감했다. 세상에는 괜찮은 백인이 훨씬 많겠지만, 유독 내 주변에는 이상한 백인이 넘쳐났는데, 이 사람이 정점을 찍겠구나 싶었다. 한 나라도 아니고 유럽을 대표하여 온 외교관이라는 게 이 수준이라니,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 주변에는 그런 여자애들이 없는데, 너는 너 수준의 여자만 만나고 다녀서 그런 것 같네. 너는 그냥 딱 그 수준으로 살아. 괜히 아닌 사람 만나서 시간 뺐지 말고."
여기까지 가니 이제 모국어로 욕이 튀어나왔다. 체코어인지 독일어인지 모르겠는 그의 욕에 나도 아름다운 한국어 욕을 시전 하였다. 대충 아시아에 온 소수인종 외노자 주제에 어딜 주류를 평가하고 앉아있냐는 내용이었다. 그랬더니 정말 소설의 한 장면이 나왔다.
"이렇게 막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나랑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볼래?"
이쯤 되니 정말 헛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나의 친구는 왜 나에게 이 미친놈을 소개해 준 것인가. 나를 정말 싫어했나 보다. 나는 미련 없이 꺼지라고 답하며 다음 약속으로 향했다. 루프탑바에서 버블티 칵테일을 마시니 속이 조금 풀어졌다.
김치야 잘 들어갔니? 라는 문자로 애프터를 신청하는 그를 조용히 차단하며 좁디좁은 싱가포르지만 다시는 마주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제법 긴 이야기를 경청해준 친구들은 말없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지만 술안주로는 제격인 나의 최악의 데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