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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설날에는 귤 두 개가 필요합니다.

싱가포르의 설날맞이

by Mel

멜입니다.


외국에서 맞는 3번째 설날이지만 가족 없이 맞이하는 첫 번째 설날입니다. 홍콩에서 맞는 첫 명절과 싱가포르에서 맞는 첫 명절에는 부모님이 오셔서 함께 보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네요. 그래서 처음으로 떡국도 김치도 없는 현지 명절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한국 연휴는 설 전날부터 시작이지만, 싱가포르의 연휴는 설날부터 시작이어서 엄격히 말하자면 기간은 다릅니다. 한국 시장을 담당하는 저는, 이번에도 한국 명절에 맞추어 목요일부터 쉬기로 했습니다. 오랜만에 집밥을 먹고 싶어 냉장고를 털어서 한국 밥상을 차려냈어요. 마침 반차를 쓴 친구가 있어 함께 하였지요. 그렇게 긴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다행히도 두 친구에게 초대를 받았어요. 확진자가 거의 나오지 않지만 싱가포르는 아직 방문객을 8명으로 제한하고 있고, 하루에 두 가정만 방문할 수 있습니다. 그 소중한 자리에 저를 넣어주어 정말 감동이었어요. 그렇게 저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reunion dinner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가기 전에 친구에게 간단한 명절 풍습을 배웠지요.


우선 머리를 깨끗하게 다듬고 깨끗한 의복을 준비하는데 이때 흰색과 검은색 옷은 장례식 의복이기 때문에 설날 당일에는 입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보통은 붉은색 옷을 입는다고 해요. 역시 중국계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싱가포르답죠? 한국에서도 설날 전에 목욕탕에서 때를 밀고 꼬까옷을 입고 할머니네를 갔기 때문에 이러한 문화는 익숙했어요.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귤 교환하기'입니다.

방문 시에는 귤 (반드시 2개)를 준비해야 하는데, 귤이 칸토니즈로 gum, 즉 금과 비슷하기 때문에 행운을 교환하는 의미라고 해요. 뒤늦게 귤을 사기 위해서 여기저기 헤매었지만 품절... 그래서 친구에게 빌렸어요. 친구네에서 가져온 귤을 다시 가져가서 교환하다니 조금 이상하지만 친구와 나만의 비밀로 남기기로 하며 귤을 드렸어요. 그랬더니 세뱃돈인 앙바오 (홍바오라고도 함)를 주셨어요.


친구의 부모님과 할머니부터 시작하여 오빠 부부, 동생 부부, 그리고 헬퍼들까지 함께한 이번 설날은 평소와는 달리 배달음식을 먹었어요. 설날에만 먹는 설날 과자도 하나씩 먹어보고, 싱가포르에서만 하는 Lo Hei를 하며 가족들과 덕담을 주고받으니 다들 시댁, 외가에 가더라고요. 한국에서는 다 같이 둘러앉아 고스톱을 치며 늦게까지 논다고 하니까 친구가 마작 테이블을 꺼내왔어요. 우리도 마작을 하면서 밤을 새운다나요. 싱가포르에서는 자식들이 늦게까지 깨있으면서 부모의 장수를 기원한대요.

일단 친구가 30분 정도 마작의 룰을 가르쳐 주었어요. 너무나 복잡했지만 하면서 배우라는 친구의 말에 마작의 세계에 입문하였지요. 곧이어 친구네 오빠와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합류하셨죠. 패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들 틈에 끼어서 정신을 못 차리기를 몇 시간. 고개를 드니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죠. 오랫동안 써먹지 않았던 중국어는 마작을 배우며 빛을 발했어요. 아버님의 중국식 개그에 꺄르르르 넘어가기를 수차례. 다음에 또 놀러 와서 마작을 두자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다음날, 다른 친구네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hotpot (샤부샤부)를 먹는 날이라 엄청 기대가 되었어요. 어제 받은 귤 두 개를 그대로 가져가서 어머니의 귤과 교환하며 세뱃돈을 받았어요. 오늘은 단출하게 친구 커플과 언니, 동생, 부모님만 있어서 조용한 설 저녁을 보냈어요. 역시 Lo Hei를 하면서 more money를 외쳤지만 왁자지껄한 어제와는 달리 다들 조용한 이 집에서는 핫팟을 먹고 빨리 귀가하였어요.


오고 가는 귤 속에서 싹트는 돈복(?)에 아주 흐뭇한 연휴였지만 가족이 보고픈 건 어쩔 수 없었어요. 영상통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받지 않는 부모님... 할머니네에서 고스톱을 치고 있나 봅니다. 빠르게 잊히는 저의 부재가 조금 슬펐지만 이렇게 서로의 삶을 살아가는 거겠죠.


떡국은 없지만 핫팟과 귤이 있는 싱가포르의 설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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