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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l Mar 20. 2021

알면서도, 알았으면서도

그래도잃어버리는 건 사람이니까

물건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아주 기가 막히게 박자가 딱 딱 들어맞는다. 목요일 아침, 회사에 늦어도 뭐라고 할 사람 하나 없지만 괜히 서두르다가 귀걸이 한 짝의 고정핀을 잘못 끼웠나 보다. 오늘은 오랜만에 친구들과 한 잔 하기로 한 날, 귀걸이를 생략할까 1초 정도 망설이다가 과감하게 아끼는 귀걸이를 꺼내 들었다. 홍콩에서의 마지막 날에 산 귀걸이. 순금은 아니지만 잘 모시고 1년 반을 살고 있었다.


회사에 도착하여 마스크를 벗는데 귀걸이가 툭 하고 떨어졌다. 순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한 데에서 안 흘린 게 어딘가? 그때 주워서 잘 보관했더라면 잃어버릴 일은 없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침 자체가 두꺼워서 귀에 딱 붙어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때 알았다. 빼지 않으면 이따가 술 마실 때 백 퍼센트 잃어버리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빼고 싶지 않았다. 알면서도 안 하는 게 어디 한 두 개인가 뭐. 


그렇게 귀걸이는 내 왼쪽 귀에 퇴근 직전까지 잘 매달려 있었다. 하필이면 내가 제일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할 일 없이 맥주만 홀짝 거리며 친구들을 30분 동안 기다렸다. 중국인이 먼저 도착해서 검은 사람은 왜 안 왔냐고 물었다. 뒤이어 인도인이 도착했고 나는 얘가 너한테 검은 사람이라고 했다며 일러바쳤다. 아무 이유 없이 웃고 떠드는 그런 날이었다. 


맥주는 언제나 기네스. 파인트로 두 잔을 마셨고, 늘 그렇듯 중국인 동료는 mountain water라며 샷을 내왔다. 그렇게 샷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싸구려 데킬라였지만 즐거웠다. 즐거웠지만 부담스러웠다. 오래전에 같은 팀이었던 동료들, 이제는 친구들이 되어버린 그들과 1년도 더 묵은 회사의 온갖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노라면 2시간을 넘기기 싫은 것이다. 다행히도 부모님께 전화할 시간이 가까워져서 먼저 자리를 떴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지만 오랜만에 본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집까지는 15분. 지하철에서 집에 걸어가다가 마스크를 고쳐 쓰는데 왼쪽 귀가 허했다. 귀걸이가 없다. 결국 나를 떠났구나. 알면서도, 알았으면서도 홍콩의 반 쪽을 보내버렸다. 언제일까를 떠올리다가 그만두었다. 이놈아,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잖아. 이 칠칠맞은 놈아. 집까지 걸어가는 3분 동안 조용히 귀걸이의 안녕을 빌어주었다. 


잃을 걸 알면서도 끝까지 고집하는 게 어디 고정핀 없는 귀걸이뿐일까. 아파트 아래 놀이터에서 멈춰 섰다. 술 김에 그네를 탔다. 머물다간 사람들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을 잃었을 때는 한순간이었고 그만큼 당황했지만 사실 돌이켜보면 시그널은 있었다. 잠시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던 적이 있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잠수를 탔다가 이내 나타났지만 전과 같은 미소를 지어주지는 않았던 적이 있었다. 알면서도 넘긴 것이 수차례였겠지. 그래 놓고 막상 없어지니 새삼스럽게 마음이 아팠다. 


알면서도, 알았으면서도 외면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특별할 것 없는 보통날에 소중하게 보관하지 못한 죄로, 잘 붙어있나 자주 확인하지 않은 죄로 그렇게 그들도 귀걸이도 떠나갔다. 귀걸이가 아까워서 이렇게 주절대는 것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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