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님 나 잡아줘요.
멜입니다.
인생은 타이밍에서 많은 것들이 갈립니다. 내가 방콕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카운터 오퍼를 더 빨리 받았다면, 빅보스랑 조금만 더 빨리 면담을 할 수 있었다면.... 수많은 '다면'들은 결국 타이밍의 차이였던 것 같아요. 그 시간 흐름들의 중간에서 저는 방향을 못 잡은 한 마리 물고기와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 주의 세일즈 미팅이 끝난 후, 팀장에게 제가 받은 패키지에 대해 공유했어요. 최근 이런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런 노력을 해보았고, 그 결과 이런 패키지를 받게 되었다. 아직 그쪽에 예스를 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지금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나의 몸 값은 이 정도는 될 터인데,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둘러서 물어보았죠.
근 3년간 동고동락을 함께해온 사이였기에 팀장에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저는 한국팀을 신설한 뒤 처음으로 채용한 팀원이었고, 옆 콘도에 살며 1년간 토요일 저녁을 공유한 이웃사촌이었고, 7명까지 늘어나 우리 팀원들의 레주메와 인터뷰를 모두 함께 공유한 사이였어요. 팀장이자 동료, 언니이자 친구로 외로운 싱가포르 생활에 몇 안 되는 빛이었어요.
하지만 그녀가 오롯이 저희 불행을 짊어질 수는 없었어요. 팀장은 인상률을 물어보더니, 옮겨가는 회사에서 타깃을 맞출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동료들에 대한 백그라운드 체크는 했는지 등등을 차분하게 물어보더니 지금 회사를 방어하였어요. 생각하는 범위였으나 그래도 서운함이 줄어들지는 않더라고요. 모순된 감정들이 솟았다 가라앉고, 팀장은 일단 본사에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진척 없이 일주일이 흘렀어요. 하지만 저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곧 떠날 방콕 여행과 한국 여행이 그대로 있었거든요.
방콕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 저녁, 저는 오랜만에 팀장과 오붓하게 긴 저녁을 함께하였습니다. 회사 이야기보다는 지금 제 인생에서 어떤 단계에 있는지, 먼저 그 길을 걸어온 언니가 동생에게 하는 말이었어요. 방콕에서 잘 생각해보라고, 정말 지금 해외생활을 접고 들어가야 하는 때가 맞는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하지만 카운터 오퍼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그냥 안녕으로 들렸어요.
그렇게 방콕을 다녀왔더니 그 사이 팀장은 또 많은 생각들을 하며 저에게 원하는 조건을 제시하라고 하더라고요. 이미 말을 꺼낸 지 2주가 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이제야 물어보다니... 그 사이 저는 회사에 대한 미련을 이미 정리하고 있었어요. 카운터로 받고 싶었던 연봉 인상은 이미 마음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 모르겠고 한국에 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전혀 생각지 않았던 카운터가 왔습니다.
3주가 지난 시점, 저는 공유 오피스에 원맨 오피스 설립 및 2년 계약서를 카운터로 받았습니다. 한국지사가 아직 없으니 미리 시장을 테스팅한다고 생각하고 먼저 가서 혼자 일하라는 거였어요. 한국에 가고 싶니? 그럼 보내줄게. 잘릴 걱정 없이 2년 계약이랑 같이. 이 조건을 일주일만 전에 주었다면 저는 콜! 했을 거예요.
하지만 저의 모멘텀은 지나간 후였어요. 타이밍이 맞지 않은 오퍼는 그렇게 물 위로 반짝 하다가 이내 가라앉았어요. 제주도행 밤 비행기를 타는 날, 카운터 오퍼를 정리하여 다시 제시하는 빅보스와의 미팅에서 저는 오히려 차분하게 저의 입장을 정리했어요. 정말 고맙지만 나는 불안정하게 한국생활을 시작하고 싶지 않다. 한국지사가 세워졌을 때 다시 이야기하자고요. 물론 그 때의 타이밍이 누구의 손을 들어줄 지는 모르지만요.
그렇게 4주간의 방황은 끝이 났고, 여전히 마지막 날을 찍지 못한 채 저는 휴가를 보내러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마음은 아직 싱가포르에, 몸은 한국에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휴가가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