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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미 Feb 10. 2023

만약에 말이야

그건 시절이야.

학창 시절, 종종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만약에 말이야, 집에 불이 난다면 넌 뭘 챙겨 나올 거야?”


‘만약’이라는 말은 얼마나 무책임하고 가벼운지. 그렇기에 얼마나 자유로운지. 따라오는 질문에 숨겨진 마음과 따라오는 답은 또 왜 이렇게 진중하고 무거운지. ‘만약’이라는 말을 중심에 두고 질문과 답을 저울질한다면 아마도 질문은 가벼워 날아가버리고 답은 무거워 땅에 붙어있을 것이다. ‘만약’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가정 일뿐인데 이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당장 일어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진지해지고 만다.


불이 난다면? 

나는 언제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빠의 사진첩이라고 말했다. 

듣는 사람은 다시 되묻는다. 

“사진첩? 그걸 왜?”

그러면 나는 답한다. 

“그건 사진이 아니라 시절이야. 시절을 놔두고 올 수는 없잖아.”


아빠의 사진첩은 시절이다. 부모가 되기 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불같이 사랑했던 연애시절이기도 하고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느꼈던 경이로움과 감탄이 그대로 담겨있는 부모 초보시절이기도 하고 두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될 때까지 지나온 슬픔과 기쁨이 모두 담긴 세월이기도 하다. 


세월은 이야기다. 시간은 품이 넓어서 모든 이야기를 품는다. 시간은 이야기를 품고 사람을 품고 사랑을 품는다. 이야기는 힘이 세다. 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몇 세대를 앞서 가기도 한다. 이야기는 공간과 시간에 메이지 않는다. 어느 것에도 메이지 않는 이야기를 품을 수 있는 건 시간이 유일하다. 시간이 멈춤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시간이 흘러감으로 이야기는 전해진다. 그리고 이런 시간들이 모여 세월이 된다. 세월은 세상이고 시간이고 모습이다. 


흘러가면 다시 줍지 못하는 건 소문뿐만이 아니다. 세월도 그저 흘러갈 뿐인데 그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지나간 세월은 다시 보지 않고 다가 올 시간을 준비한다. 하지만 이런 세월마저도 사진 앞에서는 포박당할 수밖에. 사진은 세월을 담는다. 그때의 온기, 밀도, 감정을 고스란히 담는다. 


사진이 매력적인 건 찍는 자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 찍는 자의 감정이 사진 한 장에도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 중에 하나는 사진은 찍히는 자만을 담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진을 단 한 장이라도 찍어본 이라면 이 말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진은 찍는 사람도 담는다. 그때 내가 어떤 시선으로 피사체를 바라보았는지, 당시에 어떤 햇살이 비췄는지, 피사체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를 어떤 표정으로 담고 있는지. 피사체를 담고 있는 사람. 사진은 그 사람도 담는다.


그래서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아빠의 사진첩을 들고 나올 것이다. 사진첩엔 나의 어린 시절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아빠가 있기 때문에. 가족들을 담으며 울고 웃었을 아빠가 있기에. 우리의 시절이 있기에. 되돌릴 수도 앞서갈 수도 없는 정직한 시간이 담겨 있기에. 나는 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사진첩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 우리의 시간을 들고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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