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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미 Feb 19. 2022

본질을 바라보기

마스크가 무슨 죄가 있겠니.


아마 요 2-3년 가장 많이 한 말이라면 “답답해”가 아닐까. 코로나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불청객으로 마스크와 한 몸이 된 지 벌써 2년이 넘어간다. 마스크가 생활필수품이 되어버린 생각지도 못했던 시대가 도래하면서 입버릇처럼 “아, 답답해”를 외쳤다. 코와 입으로 숨을 들이마실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숨쉬기 운동이 이렇게 고난이 될 줄이야. 마스크를 할 생각에 외출하는 날이면 벌써 숨이 턱 막히고 미리부터 답답한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작년 여름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의 하굣길을 마중 나갔을 때 일이다. 내 기억으론 아주 더운 날이었다. 여름에 비하면 다른 계절에 마스크는 그나마 괜찮다.  마스크란 녀석이 없어도 덥고 힘든 게 여름인데 마스크를 하고 오르막 내리막을 걸어가자니 너무 힘이 들었다. 


“00아, 너무 덥지? 마스크 답답하지 않아?”

“답답하긴 하지~엄마 많이 더워?”

“아니~엄마는 괜찮은데 네가 더운 날 학교에서 하루 종일 마스크 하는 생각을 하니까 얼마나 힘들까 생각이 들어서... 정말 마스크 너무 답답해! 마스크만 없었으면 숨이라도 편히 쉴 수 있었을 텐데!”


나의 토로 아닌 토로를 들은 첫째가 한동안 말없이 내 손을 잡고 걸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아이가 생각이 정리된 듯 입을 열었다.


“엄마! 근데 마스크 잘못은 아니야. 마스크 때문에 답답한 게 아니라 마스크 때문에 코로나를 막을 수 있으니까 마스크한테 고마운 거지. 코로나 때문이지 마스크 때문은 아니야. 마스크도 얼마나 속상하겠어. 내 탓은 아닌데 다들 자기한테 답답하다, 답답하다 하면서 뭐라고 하니까 말이야. 난 마스크 하는 거 하나도 답답하지 않아”


아차, 그렇지. 마스크가 잘못은 아닌데 그동안 마스크 탓만 했구나 싶었다. 정작 마스크는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는데 우린 마스크를 하면 답답하니 마스크 때문에 답답하다 그리도 외쳤다. 




때론 아이에게서 본질을 보는 눈을 배운다. 우리도 이런 눈을 가진 아이였을 때가 있었을 텐데 어른이 되면서 ‘본질’이 아닌 ‘문제’만 보는 눈이 생기고 '전체'가 아닌 '내 앞의 문제'에만 급급 해지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른이 되면서 잃은 것 중에 하나다. 본질 그대로 보기. 


나에게 지혜란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나는 본질을 볼 줄 아는 것이라고 답하겠다. 본질을 둘러싼 이해관계, 다양한 문제들, 문제를 바라보는 내 안에 있는 문제, 허위 허식들을 다 걷어내고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어떤 문제든 문제를 바라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문제를 둘러싼 것들을 걷어내고 본질을 바라볼 때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비단 사회문제뿐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어떤 사람이 섭섭하다고 토로했을 때 ‘대체 내가 뭘 부족하게 해 줬기에 섭섭해?’라고 생각하며 섭섭함의 문제에 집중하면 그 사람 마음의 본질을 볼 수 없다. ‘관심이 필요해, 내 말을 들어줘, 나는 겁이 많으니 한 발자국만 먼저 다가와 줘’가 섭섭해의 본질일 수 있다. 이런 본질을 뚫어 볼 수 있는 눈. 이런 눈은 냉철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하는 아이의 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이후로 난 마스크 때문에 답답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코로나 때문에 답답해! 는 할지언정 말이다.

(그래도 더 이상 마스크를 사고 싶지는 않다.)


* 사진은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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