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쉽게 지칠까?
우리 주변에 유독 함께 있으면 이유 없이 피곤해지고 지치게 만드는 사람이 있지 않나요?
그들과 시간을 보내면 어쩐지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만약 지금 당신이 지치고 소모된다고 느낀다면, 주위를 한 번 돌아보세요. 혹시 나도 모르게 에너지를 빼앗고 있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소중한 에너지를 뺏어가는 주관적 빌런이 분명 있습니다.
UCLA의 주디스 올로프 박사는 이런 사람을 ‘에너지 뱀파이어’라고 불렀어요. ‘에너지 뱀파이어’는 자신의 감정적 요구를 타인에게 끝없이 투사하며, 상대의 에너지를 빠르게 소모 시키는 사람이죠. 대화가 끝나면 왜 이렇게 피곤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유독 그 사람만 주는 고단함이 있습니다. ‘에너지 뱀파이어’는 다른 사람을 자신의 감정적 소모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죠. 안타까운 것은 이들도 이런 행동을 무의식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동이 바뀌기 어려운 이유죠.
‘에너지 뱀파이어’는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본능적으로 찾습니다. 이에 적합한 HSP(Highly Sensitive Person)가 ‘에너지 뱀파이어’의 좋은 표적이 되곤 하지요. HSP는 불편한 내색을 별로 하지 않고 그들의 요구를 잘 들어주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HSP(Highly Sensitive Person)는 관계에서 불편한 상황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점이 사회적으로는 둥글둥글 혹은 원만한 성격으로 보이게 만들지만, 정작 자신의 속내는 불편한 경우가 많지요. 이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끌려다니는 게 HSP의 기본 특성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상대적으로 갈등에 대한 스트레스가 더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스트레스 상황을 직접 만드는 것을 원치 않지요. 그래서 차라리 자신의 감정을 참는 쪽으로 선택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기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HSP는 지금 이 시간도 ‘에너지 뱀파이어’에게 끌려다니고 있을지 모릅니다. 스스로 희생자가 되기를 자처하면서요. 가장 큰 불행은 뱀파이어에게 희생당하면 에너지 소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잃게 만든다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에너지 뱀파이어’는 참아서 해결될 일도 아니고, 자신을 희생하면서 지켜야 할 사람도 아니예요.
에너지 뱀파이어로부터 해방하기
먼저 에너지 뱀파이어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디스 올로프 박사는 ‘에너지 뱀파이어’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눴어요.
① 피해자형
항상 자신을 불행하다고 묘사하고, 남들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적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려 하지요.
② 지배형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며, 상대가 자신의 말에 따르기를 원합니다. 타인의 감정이나 의견은 무시하고, 자신의 요구를 강요하려 하죠.
③ 극적인 유형
사소한 일에도 과도하게 반응하며, 자신의 감정을 과장해 타인의 주의를 끌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의 에너지를 소모 시킵니다.
우리는 이런 ‘에너지 뱀파이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선택을 해야 해요. 이대로 휘둘리며 에너지를 소모 당할 것인지, 아니면 관계의 경계를 명확히 설정해 나를 보호할 것인지요. 물론 이런 선택의 과정이 불편하고, ‘에너지 뱀파이어’는 쉽게 우리를 놓아 주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소중한 자신과 한정된 에너지 자원을 지키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도 없고 삶은 계속 고단하게 지쳐갈 테니까요.
주변인 중 ‘에너지 뱀파이어’가 누구인지 파악됐다면, 이제는 이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차례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에서 경계를 설정하는 거예요.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죠. HSP에게 불편함을 감수하고 거절할 용기를 갖는 게 아주 어려운 일임을 압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배웠어요. 유해한 바이러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방법은 ‘거리두기’임을 알고 있습니다. 에너지 날강도 같은 뱀파이어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방법은 거리 두기, 즉 한계 설정이예요.
전설 속에서 뱀파이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은 ‘마늘’이었지요. 주변에 마늘을 두어 더이상 뱀파이어가 접근하지 못하게 했어요. 우리에게는 마늘 같은 바운더리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그들과의 대화 시간을 조절해 보는 것이 도움 됩니다. 무작정 그들의 요구에 끌려다닐 것이 아니라, 나만의 허용 가능한 대화 시간을 정해두는 것이죠. 때로는 과감히 대화를 종료하는 결단도 필요하고요. 처음에는 어려울 수 있지만, 연습을 통해 나만의 경계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써야 나 자신을 보호할 힘에도 쓸 수 있으니까요.
관계에 대한 한계 설정은 무작정 끊어내고 회피하는 게 아닙니다. 갈등을 회피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만들고, 심리적 불안감만 증폭시키니까요. 우리 뇌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계속 떠올리며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듭니다.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하지요. 따라서 선제적으로 불필요한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만의 기준과 한계 설정이 꼭 만들어야 해요.
‘에너지 뱀파이어’가 아주 친밀한 관계일 때는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에너지 뱀파이어는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직장 동료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한계 설정에 한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를 대비해 우리는 심리적 회복의 과정을 꼭 거쳐야 합니다. 일상 속에서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만드는 것이죠. 앞에서 ‘한계 설정’이 ‘마늘’과 같은 역할이라면, 심리적 회복은 뱀파이어에게 ‘햇빛’ 같은 존재가 됩니다. 내면의 강렬하고 밝은 빛을 그들은 가장 두려워하니까요.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상황에서는 심리적 회복을 위한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일이 분명 쉽지 않습니다. 어느 날은 하루 10분 조차도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이 버겁게 느껴지니까요. 하지만 보다 장기적인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역할을 수행하며 가족과 사회 속에서 중요한 존재로 살고 있어요. 이 과정에서 나를 돌보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다는 위험성도 가지고 있지요. 단순히 나 하나만 무너지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휴식과 자기 회복의 시간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그게 단 10분이라도요. 이 시간은 정신적으로 회복할 작은 기회가 됩니다.
내가 소모되지 않도록
나만의 경계를 설정하고, 나만의 에너지를 지켜나가면 삶의 변화가 여기저기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타인의 요구에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지요. 특별히 이유 없이 지치거나 소모되는 것들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쓸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유능감을 안겨 주지요. 그리고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야겠다는 희망도 생겨납니다.
민감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에너지를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누구보다 에너지 많이 쓰고 지치기 쉬운 사람이니까요. 더이상 불필요한 곳에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은 없어야 해요. 그리고 에너지 회복이 이루어져야 다른 사람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 점은 정말 중요해요. 우리에게는 나를 거울처럼 여기며 그대로 따라 하는 작고 소중한 아이들이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