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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보면 될 줄 알았는데...

감정을 숨기는 방법만 열심히 해 온 사람

by 미미유

감정일지 1일차


오늘 그냥 좀 그랬다.


‘이런, 더 쓸 말이 없는데? 뭘 써야 하는 거지?’


한 줄 썼는데 지금의 어지러운 마음 상태를 표현할 단어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 때는 무슨 감정이라고 해야 하는 거야? 불편? 짜증?’


아무 느낌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다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혼란스럽다.


회사 다닐 때 민과장은 매일 업무일지를 작성했었다. 그날 해야할 일, 진행한 일, 준비해야 할 사항 등을 기록했다. 그래서 감정일지도 업무일지 처럼 쓰면 될거라고 가볍게 넘겨 짚었다. 쓰는 게 귀찮아서 그렇지, 막상 써보면 말보다 쉬울 것 같다고 지레 짐작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말로 표현할 때랑 별반 다르지 않았다. 머리 속에 생각만 빙빙 돌고 이걸 어떻게 잡아 써야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아 답답해졌다. 한 줄 이상 쓰지 못하고 머뭇머뭇 앉아만 있는 민과장.


'감정일지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구나..'


중얼거리던 민과장은 끝내 펜을 내려 놓았다.




감정일지 2일차


아침에 아이 울음이 크게 들렸다.
아이를 낳은 지 1년이 되어가는데, 아직도 아이가 왜 우는지 잘 모르겠다.
이런 마음은 답답함 일까? 아니면 속상함?


민과장의 감정일기는 어제보다 두 줄이나 더 길어졌다. 여전히 감정이 주는 무게는 무겁고, 단어는 뚜렷하지 않았지만 이 노트를 여는 행위 자체는 조금 괜찮다고 느껴졌다.


첫 감정모임 이후,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하다면 회의실 의자에 앉아 있던 ‘딱딱하게 굳은 자신’을 통째로 지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임의 미션인 감정일지를 이틀째 쓰고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후배 준우가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도망치는 사람으로 남고 싶진 않았다. 처음 펜을 잡을 때까진, 민과장은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오기, 체면, 선배로서의 자존심.


그러나 어제보다 조금 더 길어진 문장들을 바라보며 민과장은 알 수 없는 만족감을 느껴졌다. 감정을 적는 일은 여전히 서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손은 멈추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감정일기 3일차


아이가 낮잠을 안 자 초조해졌다.
단체톡방 알림이 울릴 때마다 초조했고, 복직일이 얼마 남지 않아 초조해졌다.
초조하니까 마음이 불안하다.


'오? 드이어 감정 하나가 떠올랐네? 초조함. 나 요즘 좀 초조했구나.‘


'초초함'이라는 단어 하나 적었을 뿐인데 쪼그라든 마음이 넓어진 기분이었다. 이제는 자신도 단어 카드에서 당당하게 감정을 고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이런 느낌이라면 지금의 상태를 이야기 해보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민과장은 3일차 감정일지를 쓰고 상기된 얼굴로 거실에 나갔다. 마침 도윤은 소파에 기대어 8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채린이는?"

"조금 칭얼거리다 방금 잠들었어."


남편 도윤이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한다.


“도윤아.”

민과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남편 이름을 불러봤다. 민과장 입에서 먼저 이름을 부르는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제야 도윤이 화면에서 눈을 떼며 말한다.


“응? 왜?”


민과장은 깊게 숨을 들이킨 뒤 말하려던 단어를 떠올렸다. 자신의 감정을 도윤에게 표현해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노트가 아니라, 사람을 향해 건네는 감정.


“나 오늘.. 좀 초조했어.”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있었어? 요즘 잠을 잘 못 자서 그런 거 아니야?”


민과장은 눈을 깜빡였다.


"아니. 특별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채린이는 자꾸 울고 달래지지가 않으니까."


민과장은 처음 생각과 달리 감정보다 상황 설명을 자꾸 하는 자신에게 실망감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들어주기 보다 질문을 통해 자꾸 답을 찾으려고 하는 남편 도윤이 갑자기 원망스러워졌다.


“그런 거 말고. 내가 왜 초조한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궁금하지 않냐고 되묻는 민과장의 질문이 도윤은 아리송하다는 눈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아이 돌보느라 고생한 민과장이 안쓰러워 보인 도윤은 최선을 다해 궁금함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아니면 육아 스트레스인가? 채린이 낮잠 루틴 다시 얘기해볼까? 아니면 수면교육 좀 알아봐줘?”


도윤의 말은 모두 틀린 말이 아니었다. 현실적인 해결책이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은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민과장의 가슴 한쪽은 조금씩 굳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답답해진 민과장은 자기도 모르게 불쑥 도윤의 마음에 상처주는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냥 오늘 내가 초조했다고 말하면 좀 들어주면 안돼?"


"궁금하지 않냐고 물어봐서 물어본 건데, 뭘 들어주라는 거야?"


"됐어. 말이 안 통한다. 그만 하자. 먼저 잘게.“


민과장은 마음과 다르게 새어 나온 말을 수습하지도 못한 채, 서둘어 방에 들어가 버렸다. 또다시 홀로 거실에 남겨진 도윤은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하다.


민과장은 적당한 표현을 찾으려다 결국 멈춰 버렸다. 자신 안의 초조함을 감정으로 알아냈다 생각했는데, 막상 다른 사람과 감정을 나누는 일은 쉽지 않자 후퇴해 버렸다. 서랍 속에 넣어둔 감정일지가 몇 분전까지는 자기 편 같았는데, 갑자기 멀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남편마저 자신에게 멀어진 것처럼 느껴지자 감정일지에 대한 회의감이 생겼다.


‘쓰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성큼 다가왔던 감정은 민과장으로부터 다시 멀어져갔다.


감정의 이름을 알았다고 해서 당장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음화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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