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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는 정답이 없나요?

카드 한 장 앞에서 무너진 자존심

by 미미유


회의실 한가운데 지오맘이 조심스럽게 카드 뭉치를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둥글게 흩어진 네모난 카드 위로 낯선 단어들이 주르륵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자 민과장은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부터 차오르는 걸 느꼈다.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가 저렇게 많다고?
내가 아는 건 그냥… 좋다, 싫다, 기쁘다, 재미있다, 화난다, 짜증 난다… 이 정도인데.’


카드 수를 대충 세어보니 50장은 훌쩍 넘어 보였다. 적혀 있는 건 분명 익숙한 한글인데, 민과장 눈에는 마치 처음 보는 외국어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특히 ‘두려움’, ‘불안’, ‘우울’, ‘후회’, ‘속상함’, ‘실망’, ‘외로움’ 같은 단어는 눈길만 스쳐도 속이 욱신거렸다. 마치 카드에 적힌 글자들이 '네 마음속 나는 어디에 있냐'며 재촉하는 것 같았다.


감정을 말해보라는 말.
지금 느낌이 어떠냐는 질문들.


그럴 때마다 민과장은 늘 답이 막혔다.

무슨 말로,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민과장이 감정에 이렇게까지 둔감해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회사에서 보낸 10년 동안, 민과장에게 감정은 일을 망치는 변수일때가 많았다. 감정이 섞인 판단은 미숙하다는 피드백을 받았고, 감정이 묻어난 의견은 신뢰를 잃기 쉬운 리스크가 되었다.


입사 3년 차 즈음이었다. 사회생활이 익숙해지고, 자신감도 슬슬 붙던 때. 그러나 실적 압박, 밀려 있는 보고서 등으로 억울함이 쌓여있을 때였다. 민과장은 그만 회의 자리에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흥분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져 버렸다. 회의는 그대로 흘러갔지만 분위기는 그대로 멈추었다. 끝난 뒤 팀장이 당시 사원이던 민과장을 조용히 불렀다.


“민 사원, 잠깐 볼까?”


회의실 옆 작은 상담실에서 팀장은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한마디 던졌다.


“민 사원, 감정 조절 좀 해요. 본부장님 있는 자리에서 뭐하는 겁니까? 거 일에 감정 끼우지 맙시다.”


그 말이 민과장의 가슴에 그대로 박혔다.


'감정 조절. 감정 끼우지 않기.'


그날 이후 민과장은 마음속에서 조용히 결심했다.

'그래. 감정을 드러내지 말자. 아니, 아예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살자.’


일할 때 감정이 비치면 ‘프로’가 아닌 것 같았다. 감정이 섞인 말은 ‘실력 없는 사람’이 하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정확한 판단만 남기려 애썼다. 숫자와 데이터로만 말하는 법, 흔들리지 않고 결과를 내는 법을 몸에 새기듯 익혀갔다.


그것이 회사에서 인정받는 길이라고 오랫동안 굳게 믿으면서.


감정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훨씬 익숙한 민과장에게 오늘 이 모임은 최대의 난관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 이런 건 줄 알았으면… 그냥 안 온다고 할 걸.’


민과장의 가슴 속에서 후회의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왔다.





감정 공유의 첫 시작.


지오맘이 먼저 카드 한 장을 골랐다.


“저는 ‘불안’이요. 아이 키우면서 늘 나아지고 싶은데, 내가 충분한 엄마인지 헷갈릴 때가 많아서요.”


엄마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유나맘이었다.


“저는 ‘기쁨’이요. 오늘 유나가 처음으로 정확한 발음으로 ‘엄마’라고 말했어요. 벅찬 기쁨이 느껴지더라고요.”


엄마들 사이에서 부드러운 웃음이 퍼졌다. 그리고 누군가 말했다.


“땡구아빠 차례죠?”


기다렸다는듯 준우가 카드 한 장을 들었다. ‘당황’ 카드였다.


“저는 오늘 아침에 땡구 초기이유식 시도하다 실패했어요. 애가 갑자기 확 뱉어서 제 얼굴에 이유식 범벅. 진짜 당황했는데 그 사진을 인스타에 올렸더니 조회수는 폭발하더라고요."


준우의 이야기로 잔잔했던 회의실이 파도가 일렁이듯 화기애애졌다. 준우 옆자리에 있던 민과장은 그 모습을 보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다음 차례가 자신인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고를 수 있는 카드가 없었다. 아니,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정의할 수가 없었다.


‘다들 왜 이렇게 자연스럽지? 어떻게 망설임 없이 편하게 자기 감정을 말하지?’


모임을 자연스럽게 리드하며 지오맘이 말했다.


“민과장님 차례예요.”



실패.


민과장은 카드 위 감정들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 많은 감정 중에 나를 나타내는 감정이 하나도 없다고?’


속으로 계속 안절부절 못 하던 민과장은 혼자 무언의 압박을 느끼다 끝내 백기를 들었다.


“아, 저는 잘 모르겠어요.”


준우가 옆에서 조심스레 말했다.


“괜찮아요, 과장님. 천천히 하셔도—”


따뜻한 도움의 손길조차 지금은 코너에 몰리는 기분이다. 민과장은 억지로 웃는 척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 처음 와서 어렵네요. 죄송해요.”


누군가 호응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회의실 공기마저 어색하게 멈췄다. 그때였다. 아린맘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음..왠지 그러실것 같았어요.”


아린맘의 한 마디에 민과장은 무언가 들킨 사람 마냥 심장이 빠르게 뛰고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황한 민과장을 보지 못한 건지 아린맘은 계속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까부터 보니까 감정을 말하려고 할 때 잠깐 멈추시더라고요. 상황 설명부터 먼저 하시고요.”


민과장의 호흡이 흔들렸다.


“이런 분들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니라, 확인하기 전에 ‘맞는지’ 생각을 먼저 하시죠.”


아린맘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지만, 민과장의 마음은 찌릿찌릿 아려왔다.


‘아이씨, 뭐야 저 여자 또.’


민과장의 단전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고 아린맘을 쳐다봤다.

미소까지 띠운 아린맘은 민과장을 향해 웃으며 한 마디 더 덧붙인다.


“그래서 금방 못 고르실 줄 알았어요. 감정이 아니라 ‘정답’을 찾으려는 스타일 같아서요.”


정답. 그 단어가 그녀의 가장 깊은 속을 정확히 찔렀다. 감정 앞에서 멈추는 이유를 자신도 설명하지 못했는데, 저 여자는 단 몇 마디로 민과장을 쉽게 간파해버렸다.


‘그럼 나는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라 정답을 찾으려고 했던 걸까? 그래서 감정이 어려운건가?’’


혼란스러워진 민과장의 손끝이 떨렸다. 회의실에 적막이 감돌았지만, 미세하게 분위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중심을 잡으려는듯 지오맘이 바로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민과장님 괜찮아요. 오늘은 그냥 쉬어가도 돼요,.”


그 말은 따뜻한 위로였지만 지금 민과장에게는 불명예스러운 낙인이 찍힌 느낌이다.


감정 카드 하나 고르지 못한 사람.

자기 감정 하나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


민과장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게 부끄러움인지, 짜증인지, 실망인지 어떤 감정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때 아린맘이 자연스럽게 감정 카드를 하나 집었다.




“저는 기대감이요. 앞으로 이 모임이 어떻게 달라질지 좀 궁금해져서요.”


그 말은 모두를 향한 말이었지만, 민과장에게만 유독 비교처럼 다가왔다.


'나는 아무것도 못 했는데, 저 사람은 기대감을 느낀다 하네.'


지오맘이 마무리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다음 주까지 간단한 미션이 있어요. 바로, '감정일지' 작성이예요. 자기 전에 하루 한 번, 오늘 느낀 감정 하나만 적어보세요. 주 양육자의 감정 상태는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이 됩니다. 내가 감정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면, 아이는 양육자의 안좋은 감정까지 떠안을 수도 있어요.”


지오맘의 말이 끝나자 엄마들은 자연스럽게 짐을 챙겼다. 지금 이 순간, 민과장은 의자에 눌어 앉은 자신의 엉덩이를 밀쳐 내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때 준우가 다가왔다.


“과장님, 괜찮으세요?”


준우의 목소리는 따뜻했지만 민과장은 그 온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맞은 편에 있던 아린맘이 일어나며 말을 붙였다.


“감정 모임이 처음엔 좀 낯설 수 있어요. 저도 그랬거든요.”


말투는 친절했고, 진심인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어진 한 문장이 민과장의 가슴을 쿡 찔렀다.


“특히, 감정을 논리로 정리해오던 분들에겐 더 어렵죠. 그런데 차차 익숙해질 거예요.”


그녀의 아주 정확한 ‘관찰’이라 더 아팠다.


‘저 여자는 하는 말마다 옳은 소리야.’


속으로 투덜거리던 민과장은 조용히 한숨 짓고 일어나 회의실 문을 열었다. 준우가 뒤따라오며 열려진 문을 잡아줬다.


“과장님, 다음 주에 또 오실 거죠?”


민과장은 ‘안 나올 거다’라고 속으로 단단히 다짐했지만, 후배 앞에서 차마 도망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감정의 흐트러짐이 없는 사람인냥 태연한 척 대꾸했다.


“응. 와야지. 감정 일지? 업무 일지 매일 쓰던 사람인데 그게 뭐 대수라고..”


준우는 안도한 듯 웃었다.


“역시 과장님. 저 사실 오늘 어색하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왔거든요. 과장님 계셔서 든든했어요.”


민과장이 피식 웃는 사이, 준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힐끗 본 준우가 허둥지둥 앞서 갔다. 장모님이 다급히 부르는 눈치였다.


“과장님, 다음 주에 봬요! 먼저 갈게요~”


준우가 손을 흔들며 단지를 가로질러 뛰어갔다. 민과장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한 번 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민과장은 책상 앞에 앉았다. 채린이는 남편이 안방에서 재우는 중이었다. 거실만 홀로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책상에 앉아 노트 하나를 집었다. 지오맘이 말했던 ‘감정일지’를 써보려는 참이다. 민과장은 한동안 노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첫 장을 펼쳤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남들 다 하는데, 나라고 못 할 이유 없잖아.’


스스로를 다독이듯 중얼거리며 펜을 쥐었다. 하지만 막상 하얀 종이 위에 펜촉을 가져다 대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오늘 감정 하나도 제대로 고르지 못했던 사람이 이제는 그 감정을 글로 쓰겠다고 앉아 있는 꼴이 우스워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일도 잘하고, 아이도 잘 키우는 만능 슈퍼우먼이 되고 싶다더니, 현실의 민과장은 감정 하나 이름 붙이는 일 조차도 이렇게 오래 머뭇거리고 있었다. 민과장은 결심을 한 듯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빈 페이지 맨 위에 또박또박 적기 시작했다.


감정일지 1일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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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부터 화요일, 금요일 연재합니다.

주 2회 민과장과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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