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과장의 첫 흔들림
“우리 애는 이제 하루 세 시간은 통잠 자요.”
“우와… 부럽다. 저희 애는 새벽 두 시부터 일어나서 잘 생각을 안 해요.”
“수면 교육은 하셨어요?”
아파트 커뮤니티 놀이방 구석에 유모차들이 가지런히 붙어 있다. 삼삼오오 테이블에 모여 앉은 엄마들은 갓 내린 커피보다 훨씬 뜨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민과장은 마시지도 못하는 커피잔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문지르고 있다.
'여기서 웃어야 해? 맞장구를 쳐야 하나? 아, 눈은 또 왜 이렇게 건조해.'
흥미와 집중력이 떨어지면 눈이 금방 건조해지는 민과장이다.
출산 전, 그녀는 대기업 홍보팀에서 브랜드 캠페인을 이끌던 파트장이었다. 회의실에서 PPT 넘기며 숫자와 전략을 다루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103동 702호의 ‘임채린 엄마'다.
오늘은 채린이와 같은 연도에 아이를 낳은 엄마들 정기 모임 자리. 아파트 커뮤니티 가입 버튼을 덜컥 눌렀다가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
“아, 오늘 처음 뵙죠?”
짧은 단발에 앳된 보이는 얼굴의 여자가 먼저 말을 건넨다. 시선이 일제히 민과장에게 향한다. 민과장은 순간적으로 명함을 꺼낼 뻔했다. 그 습관이 우습게 느껴져 미세하게 입꼬리가 흔들렸다. 숨을 살짝 고른 뒤 입을 열었다.
“네, 오늘 처음이에요.”
"혹시 닉네임이 어떻게 되세요?"
“민과장이요.”
옆자리 엄마의 눈썹이 아주 약하게 올라갔다. 보통은 아기 이름을 붙여 ○○맘으로 서로를 부르는데, 직함으로 스스로를 부르는 민과장이 신기한 듯 쳐다봤다.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을 눈치챈 민과장이 흐름을 바꾸려 한 마디 덧붙였다.
“지금은 육아휴직 중이고요. 복직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막상 말을 던지고 나니 왜 물어보지도 않은 답을 변명처럼 하고 있나 싶어 민과장은 갑자기 등줄기에 땀이 났다. 처음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던 앳된 얼굴의 여자만 여전히 민과장을 보며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오, 휴직 중이시구나. 저는 지오맘이에요. 지난주에 아이 돌이었어요. 복직 고민하다가 그냥 퇴사했고요.
아이 두고 아직은 출근할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 순간 문이 열리고 트렌치코트에 잔머리 하나 없는 묶음머리를 한 여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는 민과장 앞을 스치듯 지나갔고, 뒷모습에는 은은한 향수 냄새가 배어 나왔다. 여자가 자리에 앉자 다른 엄마들의 표정이 얇게 밝아졌다.
"아린맘 오셨어요? 오늘 처음 오신 분이 계셔서 인사 나누고 있었어요. 여기는 민과장님이세요."
"이모님한테 아린이 맡기고 나오느라 좀 늦었어요."
살짝 하이톤의 목소리를 지닌 아린맘이 또랑또랑하게 말이 이어나갔다.
"안녕하세요. 민과장님이시라고요? 여긴 회사도 아닌데 왜 과장 호칭을 쓰세요?"
틀릴 것 하나 없는 말이었지만, 민과장은 아린맘이 무례하고 도전적이라고 여겨졌다. 민과장은 시선을 살짝 내린 채, 아린맘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며 말했다.
"가장 저 다운 호칭이라서요. 많이 불렸기도 했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었어요."
"그렇구나. 반가워요. 복직할 예정이세요?”
아린맘이 복직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묻는다. 동시에 그녀 목에 걸린 실버 펜던트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민과장은 건조한 눈에 펜던트 빛까지 더해져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글쎄요… 복직 시점을 회사와 조율 중이에요.”
“저는 임신하고 바로 로펌 그만뒀어요. 아이 어릴 땐 옆에 있어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일이야 언제든 다시 하면 되니까요.”
담담하지만 또렷한 말투에서 민과장은 무언가 가슴에 콕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둘 수 있는 사람과 언제든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은 그만두는 사람 쪽이었다. 육아휴직은 점점 끝을 향해 가는데, 회사에서는 복직 후 업무 관련해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그 사실이 불안했고 마시지 못하는 커피처럼 쓰게 느껴졌다. 씁쓸해진 마음이 사람들에게 행여라도 들킬까 봐 민과장은 재빨리 표정을 숨겼다. 어색해진 공기를 깨려고 커피를 마시는 척 입가에 가까이 가져가본다. 오늘따라 민과장의 커피잔이 바쁘다.
'괜찮아. 자연스러웠어.'
속으로는 계산이 빠르게 굴러갔다. 이 부모라는 세계, 육아라는 모임에서 민과장은 신입이다. 이름도 역할도 다시 배워야 한다. 누가 강요한 것도 없는데 민과장의 가슴 안에서만 작은 엔진이 계속 돌아갔다.
“요즘 감정기복 심하지 않으세요?”
지오맘이 부드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민과장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육아하다 보면 다들 그렇지 않나요?”
“맞아요. 반복되는 하루, 똑같은 일상에서 자신을 놓치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저는 감정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하루 5분만 적어도 마음이 덜 흔들리더라고요.”
감정.. 일기.
민과장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감정까지 기록하라고? 난 감정이 뭔지 구분도 잘 못하는데.'
겉으로는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마치 공감을 빌린 반응처럼. 문득 놀이방 창밖을 보는데 낙엽 하나가 떨어졌다. 바닥에 천천히 내려앉는 그 모습이 민과장 마음속 무언가가 내려앉는 속도와 겹쳐 보였다.
유모차가 과속방지 턱을 덜컹 넘었다. 민과장의 마음도 덜컹거렸다. 모임이 끝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상하게도 머릿속은 계속 시끄러웠다.
‘뭐가 이렇게 불편하지?’
다른 엄마들은 마음 얘기를 자연스럽게 하고, 고민도 말하고, 육아 팁도 툭툭 나눴다. 그런데 민과장은 말 몇 마디 하기도 버거웠다. 단순히 처음 본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낯가림이 아니었다. 회사에서는 누구보다 정확하고 빠른 사람인데, 여기서는 묘하게 뒤처지는 느낌이 계속 민과장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직급도, 실적도, 보고도 없는 세계. 그런 곳에 앉아 있자니 마치 ‘민과장’이라는 껍데기는 벗겨지고 안쪽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채린이가 유모차 안에서 햇살과 함께 포개지며 민과장을 향해 웃고 있다. 짧은 순간, 민과장은 뜨끔했다.
‘일도 육아도 다 잘하고 싶은데.. 채린아, 엄마 잘하고 있는 거 맞는 거지?’
채린이는 여전히 엄마를 보고 웃고 있을 뿐, 답은 들을 수는 없었다.
무슨 문제인지 설명할 순 없지만 민과장의 마음은 분명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이 마음이 단순히 ‘잘하고 싶다’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다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일도, 육아도 완벽하게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함이 아니라 무모하리만큼 큰 기대감인지. 그 기대감이 끝내 자신을 괴롭힐 것이라는 것을 민과장은 이때까지 몰랐다.
그리고 다음 날, 카톡방의 사진 한 장이 민과장의 흔들림을 폭주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