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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과장의 불안한 오후

by 미미유

사무실 조명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빛은 일정하고, 차가울만큼 강렬해 감정이 설 곳이 없어 보였다. 이곳에서 민과장은 10년째 일하고 있다.


메일함엔 ‘중요’ 표시가 줄줄이 쌓여있다. 마감, 수정, 결재, 확인 요청. 제목 앞 글씨들이 서로 먼저 봐달라 아우성이다. 민과장은 잠시도 손을 멈추지 않는다. 일이 흐름을 타면 멈출 수가 없다. 일이 멈추면 자신도 멈추는 것 같다. 오늘도 점심은 눈치껏 넘겼다. 끼니보다 일의 완성이 더 중요하니까. 허기를 달래려 서랍에서 꺼낸 단백질바를 조용히 베어 물 때, 후배 준우가 말했다.


“과장님, 오늘도 퇴근 안 하세요?”

“이거 마감만 보고. 먼저 가.”


어느덧 밤 9시, 바깥 풍경을 비추던 창문은 거울이 되어 민과장을 비추고 있다. 프린터 앞에서 문서를 들고 선 채, 문득 거울 같은 창문 속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단정한 정장과 하얀 셔츠. 그 위로 매끈한 립, 살짝 흐트러진 머리매무새. 평소와 다름이 없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숨기기 어려운 불룩한 배.


'내가 이렇게 변했구나.'


짧은 탄식이 공기중에 흩어진다.


민과장은 삼십대 후반에 조금 늦은 임신을 했다. 한때는 이 나이쯤이면 ‘임원 트랙’을 타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출산 휴가를 앞둔 평범한 휴직자일 뿐이다. 조기 진통 위험으로 휴직 일정이 앞당겨졌다. 내일이면 잠시 회사를 떠난다. 책상 위 정리 못한 서류처럼 마음도 정리되지 않았다. 입사 후 10년 만에 처음 갖는 긴 휴식인데 마냥 반갑지만 않다.


휴가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근무 날, 본부장이 말했다.


“이제 좀 쉬어. 회사는 걱정하지 말고.”


축하거나 배려로 들리길 기대했지만 민과장의 귓가에는 ‘너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간다’라는 의미로 들렸다. 이상할 만큼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동안 자신을 움직여온 것은 ‘성과’였다. 성과가 곧 존재의 증거였다. 그런데 일을 멈추면… '나는 어떻게 되는걸까?' 그 질문이 마음속에서 오래, 그리고 깊게 메아리쳤다



10개월 후


민과장의 세계는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회의실 대신 거실, 사무실 책상 대신 젖병, 프로젝트 일정표 대신 이유식 스케줄표를 만든다. 낮엔 젖병과 거즈 손수건을 삶고, 밤엔 수유 알람에 맞춰 쪽잠을 오간다. 어느새 민과장의 하루는 ‘성과’가 아니라 ‘생존’으로 측정된다. 하루의 끝이 어디 있는 지 모르는 삶이 열 달 째 지속되고 있다.


민과장은 원래 개인주의자다. 업무 외의 대화는 비효율이라 생각했고, 목표가 명확하면 불안이 줄어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육아는 달랐다. 매번 정답이 없었다. 예방접종 일정은 헷갈렸고, 낮잠 루틴은 매번 깨졌고, 이유식은 책 속 사진처럼 절대 되지 않았다.


검색하면 답은 천 개쯤. 하지만 어떤 것이 ‘내 아이’에게 정확히 맞는 답인지 도통 모르겠다. 그래서 민과장은 실패를 최소화하려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대다수가 쓴다는 국민템, 가장 많이 추천되는 이유식 레시피…

일하던 방식 그대로 적용했다. 하지만 아기는 업무가 아니었다. 예측 가능하지도, 통제할 수도 없었다.


새벽 두 시.

민과장은 젖병을 내려놓고 아이 옆에 누워 휴대폰을 켰다. 이유식 정보, 낮잠 루틴, 발달 자료…스크롤을 내릴수록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알아야 할 건 많은데, 어느 게 아이한테 맞는 답이냐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일에서는 언제든 답을 찾았는데, 육아에서는 아무리 해도 정답이 없었다.



다음 날,


유모차를 밀며 단지 산책길을 돌던 민과장은 관리사무소 게시판 앞에서 발을 멈췄다.


[한가람 아파트 24년생 부모 모임 │ 정보공유 & 오프모임 │ 금요일 2시]


A4 용지 한 장이 유독 시선을 사로 잡는다.

익숙한 서체, 낯선 단어. ‘부모 모임.’


공지글에 QR코드 하나가 눈에 들어왔지만, 손끝은 갈 곳을 잃고 망설인다.


‘이런 모임도 있었네?‘

‘여길 들어가야 하나? 아이를 위해서?’
‘이런 모임 체질이 아닌데…’


하지만 곧 다른 생각이 따라왔다.

‘그동안 혼자 버티느라 힘들었잖아.’

‘정보만 얻으러 가보는거야.’


민과장은 결재 승인 버튼 누르듯 모임 가입 버튼을 눌렀다.


- 닉네임: ‘민과장.’
- 자기소개: 24년생 여아 키우는 민과장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클릭.


‘가입이 완료되었습니다.’


그 문장은 감정이 없는 시스템 메시지였지만, 민과장의 심장은 불쑥 뛰기 시작했다.

아이가 가져다 준 부모라 사회, 그 '관계'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민과장은 아무 반응도 없는 휴대폰을 자꾸 들여다본다.

'누가 환영인사를 남겨줬을까? 새로운 글이 뜨려나?‘


아무 반응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기대됐다.


아이 옆에 누워 불을 끄고 눈을 감았을 때, 머릿속에 아주 선명하게 두 가지가 떠올랐다.


금요일, 오후 2시.


민과장은 자신도 모르게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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