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과장은 회의실 문 앞에서 주인 잃은 강아지 마냥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들어갈까? 말까?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긴 그렇잖아. 일단 가보자.'
용기를 낸 민과장이 회의실 손잡이를 잡고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 이미 몇 명의 엄마들이 둘러앉아 있었고, 한쪽에는 지난번처럼 감정카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준우도 회의실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린맘도 어김없이.
“어, 과장님.”
준우가 먼저 눈을 마주치며 환하게 인사했다.
“왔어?”
민과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준우에게 손 인사를 살며시 들어 보였다. 지오맘이 두 손을 모으고 두 번째 모임의 시작을 알렸다.
다 오신 것 같으니 시작해 볼게요.
지난주에는 현재 마음이 끌리는 감정을 골라봤어요.
오늘은 조금 다른 시도를 해보려고 해요.
그녀가 테이블 가운데로 감정카드를 옮겨 놓았다. 카드에는 ‘불안’, ‘서운함’, ‘외로움’, ‘수치심’, ‘질투’, ‘죄책감’ 같이 조금 반갑지 않은 단어들이 또렷하게 쓰여 있었다.
“오늘은, ‘지금 가장 꺼내기 싫은 감정’ 하나를 골라볼 거예요. 말하고 싶지 않은 감정일수록, 사실은 우리 삶을 제일 세게 건드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거든요.”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가장 꺼내기 싫은 감정이라니!'
민과장은 카드를 바라보는데 또 눈이 건조해졌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억지로 집중해 보았다. 공교롭게도 민과장 눈에 ‘질투’라는 단어가 먼저 들어왔다. 끝까지 꺼내기 싫은 마음이라 외면하고 싶은데, 질투 카드는 나 좀 봐달라며 민과장의 눈길을 잡아끌고 있었다.
'질투…? 내가…? 아니야. 유치하게 무슨 질투야.'
민과장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질투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나, 어린아이들 사이에나 있는 감정이라며 튀어나오려는 충동을 밀어 넣었다.
만약 질투 카드를 잡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 민과장은 스스로 유치한 사람이라고 자백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그래서 마음속으로 다른 카드를 잡으라고 주문하고 또 주문했다.
‘민과장. 다른 감정 잡아. 그래야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 있어. 질투나 하는 유치한 자신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구!’
민과장의 복잡한 마음은 방황하는 손끝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초조함’으로 손을 뻗었다가, ‘불안’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가, 그러나 결국 손을 거둬들였다.
“카드는 본능적으로 끌리는 걸 집으시는 게 좋아요.”
지오맘의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깨웠다.
“민과장님, 머리로 고르지 말고 그냥 손이 가는 대로 해보세요.”
부드럽게 이끄는 지오맘의 눈빛을 보며 민과장은 살짝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결심한듯 그대로 손을 뻗자, 자석처럼 이끌렸다. 그녀의 손끝이 닿은 건 ‘질투’. 자신도 모르게 카드를 집어 드는 순간, 민과장은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아, 나 정말 이걸 고른 거야?'
'질투'카드를 받아 든 지오맘이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진행을 이어갔다.
“그럼 오늘은 질투로 가볼까요? 질투를 주제로 각자 떠오르는 장면이나 경험을 나눠 볼게요.”
지오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과장의 탄식이 속으로 새어 나왔다.
'망했다.'
한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요즘 SNS 보면 질투가 많이 나요. 아이들 자랑을 왜 그렇게 올리는지. 보다 보면 우리 아이만 못난 것 같고 기분이 막 뒤틀릴 때가 있어요.”
다른 엄마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맞아요.”
“그럴 때 있죠.”
분위기가 조금 풀리자 또 다른 엄마가 말을 이었다.
“전 남편이요. 남편이 회사에서 여유 있어 보일 때, 저는 하루 종일 애랑 씨름했거든요. 퇴근해서 ‘아, 힘들다’ 한마디 하면 부러우면서도 질투가 나요. 남편은 계속 경력을 이어가는데 저는 아이 보느라 경력이 중단되니까 속상해서 그런가 봐요.”
공감 섞인 한숨이 섞여 나왔다. 지오맘이 고개를 끄덕이며 민과장을 바라보았다.
“민과장님은 어때요?”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이름에 민과장은 자세를 조금 고쳐 앉았다.
“아, 저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민과장은 한 번 기침을 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이어갔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요즘 들어 질투 같은 게 자주 올라오는 것 같아요. 특히 저랑 비슷한 또래인데 일도 계속 잘하고, 육아도 잘하는 사람들 보면 그래요.”
말하면서 동시에 머릿속에 몇몇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회사 동기, SNS 속 승승장구 하는 워킹맘, 그리고 맞은편에 있는 아린맘까지. 민과장은 머릿속의 얼굴들을 애써 밀어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을 미워한다기보단 그냥 제가 너무 초라해지더라고요. 예전에는 그래도 ‘일 잘하는 민과장’이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다 빠져나간 느낌이라 자꾸 비교가 되더라고요.”
살아나려던 회의실 분위기가 민과장 이야기에 또다시 조용해졌다. 침묵이 어색한 민과장은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다. 몇 번 보지도 않은 사람들한테 속 깊은 이야기를 불쑥 꺼내고 있다니. 이런 자신이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민과장은 자신을 포장할 수 있는 말을 최대한 빠르게 고르고 싶었다. 하지만 고를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손바닥과 등줄기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 그러니까 제 말은 질투라기보다…”
하지만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다급하게 변명거리를 찾던 민과장은 순간적으로 이것저것 변명하려는 자신이 구차하게 느껴졌다. 그때 용기인지 막무가내인지 모를 단호함이 민과장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래요. 질투 맞는 것 같아요.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이랑, 지금 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같이 생기니 복잡해져요.”
민과장의 급진적인 고백에 침묵이 흐르던 회의실은 더욱 조용해졌다. 회의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만 눈치 보지 않고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때 아린맘이 손에 든 카드를 한 번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질투라는 감정을 오래 붙잡고 있지 않는 편이에요.”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회의실의 적막을 깨웠다. 부드러웠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꼿꼿하게 공기 중에 박히고 있었다.
“질투가 올라올 때가 있긴 한데, 그럴 때마다 그냥 ‘아, 내가 거기까지는 못 가 있구나’라고 인정하고, 그 시간에 제가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에 집중해요. 질투할 시간에 몸을 움직이는 편이 더 편하거든요.”
몇몇 엄마들이 “오…” 하고 감탄 섞인 소리를 냈다. 아린맘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질투는 상대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가 내 삶에 만족을 못 해서 생기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 자존감을 먼저 챙기려고 해요. 비교하다 보면 끝이 없으니까요.
민과장은 이 말이 마치 자신을 겨누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불편해졌다.
'내가 내 삶에 만족을 못 해서 질투하고 있다는 건가?'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이 말을 되뇌었다. 지오맘이 아린맘 의견에 호응하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자존감 얘기도 참 중요한 지점이죠. 다만 질투라는 감정이 꼭 나쁜 감정만은 아니라는 것도 같이 봤으면 좋겠어요. ‘내가 진짜 뭘 원하는지’를 보여주는 신호일 수 있거든요.”
그때,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준우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도 비슷한 감정 느낀 적 있는데요, 회사에서 선배들이나 동기들 잘 나가는 거 보면 제 자신이 초라해질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내 자존감이 문제다’라고 생각하면 더 숨고 싶어 지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냥 ‘아, 나도 저렇게 되고 싶은 거구나’라고만 인정하려고 해요. 그게 질투든 뭐든, 어쨌든 내가 뭘 원하는지 알려주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덜 숨게 되더라고요.”
누군가 “그 말 좋다” 하고 중얼거렸다. 지오맘도 미소를 보이며 준우의 말을 받아줬다.
“맞아요. 아주 중요한 포인트예요. 질투를 느낀다는 건, 거꾸로 말하면 ‘나도 저 방향으로 가고 싶다’는 신호일 수 있어요. 감정 자체를 부끄러워하기보다, 그 안에 숨어 있는 나의 욕구를 들여다보는 게 더 도움이 될 때가 있죠.”
다시 생기가 도는 회의실 분위기와 달리 민과장은 점점 더 낯빛을 잃어갔다. 아린맘의 말이 자꾸 마음 한가운데 걸렸다. 자신의 삶에 만족을 못 해서 생기는 감정이 질투라면 방금 자신의 고백은 ‘나는 내 삶에 만족 못 하는 사람입니다’라는 선언 같았다.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할게요. 이번 주 감정일지는 지난주 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양식으로 써보는 거예요. 이 양식에 맞춰 한 주 동안 느껴진 감정을 적어보세요."
지오맘의 마무리 안내와 함께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날 채비를 갖췄다. 하지만 민과장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자존심이라는 옷이 벗겨서 맨몸으로 나가기 부끄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음에 담아 둔 질투를 입 밖으로 꺼냈을 뿐인데 인생의 빨간불이 들어왔다.
'나는 왜 질투가 부끄러울까?'
다음화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