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6. 화. 파리의 일상여행자 20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노틀담의 곱추> 같은 작품들은 그냥 탄생한 것이 아니다.
빅톨 위고는 집필이 시작되면 모든 옷을 벗어던지고 하인에게 자신의 옷을 감추라고 지시했단다.
몰입의 절실함으로 벌거숭이 상태로 서서 글을 썼다는 빅톨 위고의 절박함이랄까?
나도 그처럼 절실한 몰입감에 대해 공감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방안에서 잃어버린 바늘은 방안에서 찾아야하는데 방 밖이 밝다고, 바늘을 밖에서만 찾아 헤매고 있다.
방황의 나날, 방황의 시간들....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핑계들도 많다.
인생 혼자 사나? 관계 속에 소통하며 살아가는 지혜로움?
뭐 이런저런 핑계들로 나는 오프라인과 온라인 쌍방향의 관계망을 오가며 지루해진 글쓰기, 또는 숙제가 된 글쓰기에 대한 책무감을 피하기 위한 온갖 잔머리를 다 동원하고 있건만 빅톨 위고는 글쓰기를 위해 자신의 옷을 감추고 외출 불가의 알몸뚱이가 되어 집필에만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새해 벽두부터 참 아름다운 지혜 앞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빅톨 위고 기념관이 된 그의 집에 가서 위고의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에 충격을 받았다.
위고는 단순한 문인이 아닌 총체적 아트 디렉터였던 것이다. 그가 집필 테이블 옆에 놓고 쉬던 침대 디자인, 중국의 방을 수놓았던 차이니스 앤틱 스타일의 월 페이퍼, 중국 도자기들, 집 안 곳곳에 닿아있는 그의 예술적 취향과 공간의 아름다움이 참 놀라웠다.
특히 중국의 방과 위고의 침실이자 집필실은 영국의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는 와데스돈 장원의 흡연실 실내장식과도 많이 흡사하여 대저택의 위엄과 장엄을 느끼게 해주기도 했다. 램브란트의 경우는 화가니까 비주얼에 예민하여 집안을 아름답게 꾸몄으리라는 상상이 가능했지만, 위고의 집은 상상 그 이상의 것이었다.
공간과 환경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공간신경학적 관점이 아니라 해도 상식수준에서도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위고의 집은 아주 특별했다. 내가 좋아하는 <북경이야기>를 쓴 데이비드 키드의 교토의 집 ‘도원동’은 데이비드 키드 자신의 패션 감각과 미학이 집으로 구현된 총체적 패션예술로서 빛나는 집이다. 중국의 고미술품과 일본의 전통방식 가옥과 정원들, 페르시아 양탄자 등이 너무도 고졸한 찬란함으로 발현되며 특히 밤에 수 많은 스탠드 불빛으로 집안을 밝힌 모습은 환상 그 자체다. 집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데이비드 키드의 도원동과 윌리암 모리스의 레드하우스를 통해 알았다.
빅톨 위고의 집에 오르자 다시 한 번 그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윌리암 모리스가 제인과 쓰던 레드하우스의 침대를 욕망하다 나는 침대 없이 살았다. 그러나 결국 윌리암 모리스 부부의 침대와 같은 침대를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런데 빅톨 위고의 침대가 또 다시 나를 자극하기 시작한다. 물론 유학 가는 주연샘이 선물한 편백나무 침대도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난 욕망한다. 차이니스 앤틱 스타일의 월 페이퍼로 장식된 방에 위고의 붉은 침대를 놓고, 위고가 쓰던 테이블에 의자만 하나 덧붙여 노트북으로 글을 쓰며 삼매경에 접어드는 나의 일상은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고혹적이고 아름답다.
위고의 집은 그랬다. 뭐든 상상하게 해주었고, 뭐든 그 이상의 상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간이랄까?
운영시스템도 아주 잘되어져 있고, 스탭들도 무척 친절했던 그곳.
나는 빅톨 위고의 집에서 영글었던 위고의 문학과 삶만을 엿 본 것이 아니라 나의 삶과 꿈에 직면하게 되는 마술도 경험했다.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 넘버의 원작자로서의 빅톨 위고가 아니라, 선배 예술인이자 라이프스타일리스트로서의 빅톨 위고라는 한 개인을 바라보고 좋아하게 된 계기도 되었다.
위고가 사랑한 것은, 어쩌면 문학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였고,
그는 단순한 문학가가 아닌 총체적 아트디렉터이자 스타일리스트로
‘참살이’에 대한 뛰어난 감각을 지닌 스타일쟁이며 사랑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행의 감동은 늘 이렇듯 뜻밖의 발견에서부터 갑자기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