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은형 Jan 10. 2023

가족앨범 3.

새벽 천자문 수업시간이 즐거운 이유는 일상에서 모르는 글자나 글귀를 서당 훈장님이신 이규춘 박사님께 그때그때 여쭤보고 깨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침 가족앨범 제작 중 두루마기를 입으신 증조외할아버지와 엄마 외사촌 사진이 눈에 들어왔고 사진에 쓰인 작은 글씨가 궁금해졌다. 마침 어제 수업시간에 질문을 드리니 ‘송광사참배기념’이란다.


 아~~~ 일단 한문은 어렵다는 나의 생각이 그 쉬운 글자를 읽지 못하도록 나의 눈을 막고 장님으로 만들었음은 물론  영어를 못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겠구나 생각하니 습관적인 망상에 눈을 가린 나 자신이 무척이나 창피했다. 


그런데 사진을 들여다보시던 훈장님이 깜짝 놀라시며 사진 속 사람들이 누군지 물으시는 것이 아닌가? 오른쪽에 있는 젊은 남자가 들은 조화가 바로 과거시험에 합격했을 때 의식에서 이용하는 상징물이라는 것이었다. 사료적 가치로도 아주 귀한 사진이라고 잘 간직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병원에서 퇴원하신 엄마께 여쭤보니 사진에서 왼쪽 분은 우리 엄마의 외할아버지로 파평윤씨 성을 가지신 당시 유명한 유학자이셨단다. 증조 외할아버지의 존함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엄마의 치매문제가 아니라 56년 동안 외가의 친인척들의 관계에 무심했던 나의 문제다. 


젊은 사람은 엄마의 사촌오빠시란다. 그런데 서당훈장님이셨던 엄마의 외할아버지와 꽃을 든 외사촌오빠가 불법에 진심이셔서 금강산까지 두루두루 유명한 사찰과 승려들을 찾아다니시며 기도와 명상등을 공부 하셨으나 한국 전쟁 등 역사의 굴곡에 따라 집안이 쇠락하여 엄마의 외사촌오빠도 어려운 삶을 살다가 일찍 하직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시기 직전까지도 겸손하나 당당한 품격은 잃지 않고 사셨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문득 우리 외할머니가 담배밭에서 일을 하시다가 연초를 한 대 피워 물으시며 내게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은형이 너는 커서 선생이 되라고. 사실 여자들이 공부를 해야한다고. 선생이 되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못 배운 엄마 한도 풀어주고 어려운 아이들 공부도 네가 앞장서서 거들어주라고.. 


  외할아버지는 조선팔도를 여행다니심은 물론 금강산과 만주도 여행을 다니시던 풍류객이셨으나 젊은 시절 감나무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치셔서 농사일은 전혀 하지를 못하셔다고 한다. 그래서 농사는 할머니가 하고 엄마가 다섯 명의 남동생들을 업어 키우느라 초등학교 입학식만 가고 학교를 다니지 못했단다. 


할머니는 증조외할아버지가 서당을 하셔서 여식인 이유로 정식 교육은 받지 못했어도 사서삼경을 모두 외우고 계셨다고 한다. 하지만 사는 것이 너무 고달퍼서 할머니가 글을 알고도 큰 딸이었던 엄마를 학교는커녕 천자문조차도 가르칠 형편이 되지 못했다고 했다.


학구열이 대단했던 엄마는 동생들을 업고 밭에 밥을 나르고 집안일을 하면서도 매일매일 숨어서 학교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많이도 울었단다. 하필이면 외할머니네 집이 남이초등학교 바로 뒷집이었기에 마당과 텃밭과 부엌에서 듣게 되는 수업시간 아이들의 매 맞는 소리까지도 엄마에겐 큰 고통이자 부러움이고 슬픔이었다고 하셨다. 그래서일까? 무식하다는 소리를 가장 싫어하셨던 엄마! 


오랜 병원생활로 더 심한 치매를 앓고 계신 엄마는 남동생을 아버지와 오빠로 혼동하고 온갖 기억이 모두 뒤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다니지 못한 것을 여전히 가장 수치스러워하신다. 약혼하실 때도 교육청에 다니시던 아버지가 엄마의 무학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끝까지 그 사실을 스스로 외면하셨다. 


저토록 예쁜 20세의 약혼녀에게 초등학교 졸업증명서가 필요했을까? 싶지만, 아버지는 졸업증명은 고사하고 그냥 엄마를 처음 본 순간 단번에 눈이 멀었었지만,엄마에겐 늘 초등학교 졸업증서가 큰 결핍이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것이 예쁨에도 결핍을 낳고 배부름에도 결핍을 낳고 모든 삶의 국면에 결핍을 만들었다. 엄마 환갑 즈음에 야학이나 노인대학 같은 곳에 입학해보시라고 권유드렸지만 


“ 남들이 내가 초등학교도 못나왔다는 것을 알면 무시할거야. 남들은 내가 중학교는 나온 줄 알아. 내가 학교는 나오지 않았어도 글도 잘 읽고 셈도 바르고 경우지고 얌전하고 뭐든 잘한다고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동갑내기 친구 계원들도 내가 초등학교는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 야학에 들어가면 망신스러워. 그냥 살아도 되는데 망신당할 일을 뭣 때문에 일부러 만드누? ”


라는 말을 하시면서 거절하곤 하셨다. 속도는 느리지만 글을 잘 읽고 잘 쓰심은 물론 늘 책을 옆에 두고 한자 한자 꼼꼼히 읽으시며 가계부에 짧은 일기들을 기록하시던 엄마의 모습을 보고 누가 무학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엄마의 일생을 두고 가장 최초의(아들인 삼촌의 탄생이라는 사건 빼고) 가장 치명적인 상처였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신경학적으로 “내면아이”라고 부른다. 그 덕분에 명예퇴직 후 효도하려고 엄마를 동유럽 여행에 모시고 갔다가 비 내리는 이국땅에서 오히려 뺨을 수 십대 맞고 말았다.  엄마가 안고 있는 귀여운 갓난아기인 내가 태어난 지내가 태어난 지 53년 만에 처음으로 부모님한테 맞은 뺨이었다. 

2023.1.10.화요일.


작가의 이전글 가족앨범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