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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형 Jan 11. 2023

가족앨범 4.

2023.1.11.수요일.


엄마에게 뺨을 맞았던 건 한국이 아닌 이국땅 크로아티아의 유명한 관광지 광장에서였다.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만 해도 엄마는 평소 친절하고 인정 많고 사교적인 성격그대로 현지인들에게 한국말로 먼저 말을 걸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아기가 귀엽다며 만원을 꺼내서 손에 쥐어 주시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그게 문제의 발단이 될 줄은 몰랐다. 돈을 받은 크로아티아 아기 엄마가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짓기에 내가 “I’m sorry”하며 엄마께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마치 선생이 학생을 나무라듯이 말했다.


“엄마! 이런 곳에서 함부로 돈 주고 그러면 예의에 어긋난 것일 수 있어요. 애기 엄마가 기분 나빠 하잖아요. 여기 사람들 문화에서는 구걸하는 것처럼 기분 나쁜 것일 수 있으니 이제 그러지 마세요. ” 


당시에는 아주 더 독선적이고 짜증 섞인 독극물처럼 유독한 지시명령어였을 것이다. 엄마는 당장 독한 언어의 부정적인 파장에 찔렸고 “엄마는 못 배워서 교양이 없고 무식해요.“라고 받아들이셨다. 어쩌면 엄마의 그런 듣기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때 교사직을 명퇴한지 불과 두 달도 넘지 않은 시점이었고, 책을 쓴다면서 아만심과 교만심이 가득한 참 유독한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사표내고 선생을 그만둔 사실을 엄마에게 들켜서 그렇지 않아도 늘 마음에 불안을 짐으로 안고 살아가시는 엄마에게 불안을 가중시킬까봐 조마조마했다. 내가 살아온 지난 세월 동안 수도 없이 많은 거짓말을 해왔겠지만, 아니 대부분이 진실과는 거리가 먼 왜곡되거나 조작된 거짓이었겠지만 세 번은 아주 명확하게 의도적으로 부모님을 속이고 거짓말을 했다. 


그 첫 번째가 초등학교 시절 엄마가 무척이나 아끼시던 이태리제? 크리스탈 물병을 깨뜨리고 혼날까봐 뒤뜰 김장독 묻는 땅에 묻고 모른다고 잡아뗐다가 김장때 독을 묻다가 들켜서 회초리를 맞았고, 두 번째가 아이 아빠와 부모님 모르게 별거하면서 아무 일도 없는 척하고 살다 갑자기 찾아온 엄마를 옛집 현관문 앞에 주저앉아 통곡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세 번째 거짓말은 애 데리고 혼자 사는 사람이 직장 놓으면 큰일 난다는 엄마 몰래 사표를 던지고 작가로 전업한 것이었다. 그런데 들통 나지 않는 거짓말이 거짓말이겠는가? 오로지 자식에 대한 헌신으로 기르고 가르치셨으니 세상에 아름다운 풍경 하나쯤 가슴에 담아드린다면 ‘결혼생활에 실패한 여식’ 때문에 가슴을 앓는 엄마를 위한 작은 위안이 될 것 같았다. 


퇴직금 일부는 당연히 엄마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돌려 드려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즈음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했던 드보르니크를 가기 위해 동유럽 여행을 선택했으나 엄마가 감당하기엔 비행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첫 책을 집필 중이던 나 또한 원고에 쫓기며 날 밤 세우기를 밥 먹듯 하다 비행기를 탔기에 그냥 곯아떨어져 거의 16시간을 비행기의 무료한 어둠 속에서 뜬 눈으로 잠 못드는 엄마를 방치했다. 그런 상태에서 비행기에서 내려 막 기분이 좋아졌던 엄마에게 여행 에티켓 운운하며 가르쳤으니 그나마도 무학에 대한 큰 상처를 안고 있던 엄마의 내면 아이가 성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당연했다. 그 순간 마주쳤던 엄마의 눈빛이 서늘하게 낯설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그 때 나도 왠지 모를 불안에 감염되었음을 알았다.


이동하는 버스에서부터 엄마는 약간 좀 이상해보였다. 갑자기 동생 밥을 주러 집으로 가시겠다는 것이 아닌가? 비행기를 타러 대전에 오시기 전날도 밤 세워 동생 반찬을 만들어놓으셨다는 말씀이 그 때 생각이 났다. 설마... 83세의 엄마가 견디기엔 너무 먼 곳으로 왔구나... 결국 버스에서 내려 관광지 광장으로 가는 길에 엄마는 당장 집으로 가겠다며 버티셨다. 여긴 외국이라 집에 그냥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엄마를 설득했지만 엄마는 게의치 않고 내 뺨을 있는 힘껏 후려갈기면서 말씀 하셨다. 


“ 너 엄마가 어려서부터 거짓말 하지 말라고 가르쳤지? 그런데 왜 거짓말해? 니들 엄마가 못배웠다고 무시하는 거야?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온 거지 우리가 외국에 나온 것이 아닌 것을 내가 다 아는데? 니가 엄마가 무식하다고 무시해서 거짓말하고 속이는 거지? 내가 너 거짓말하고 살라고 그 고생하면서 가르치고 대학까지 졸업시킨줄 알아? 그것도 선생이 거짓말하면 나라 망하는거여. 훈장이 똑바로 살아야 애들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지. 어디서 엄마를 무시하고 거짓말이야? ”


다시 날아드는 엄마의 손바닥, 또 다시 날아드는 손바닥, 손바닥, 손바닥, 손바닥, 손바닥...

나는 이 기이한 상황에, 당황스럽고 무섭고 두렵고 못 견디게 불안한 현실이 나의 현실이 아니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그 커다란 광장 한복판에서 관광객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엄마에게 폭풍 싸다구를 수도 없이 맞으면서 무릎 꿇고 울면서 빌고 또 빌었다. 심연 속 깊이 숨겨두었던 용암과 같이 뜨겁고 붉은 엄마 삶의 분노와 스트레스가 대폭발했던 것이다. 나는 엄마에게도 치매가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 깨달았다. 


엄마는 이틀 밤을 지새운 데다 갑자기 낯선 환경에서 찾아온 스트레스로 섬망 증세(derlirium symptoms)에 의한 환각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가 당면한 현실은 엄마 두뇌작용에서는 완벽한 사실이었다. 간신히 엄마를 수습하여 버스에 올라 호텔로 이동했으나 남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 집에 가겠다는 엄마의 확고한 의지를 나 혼자서 꺽을 수는 없었다. 비는 내리고 집을 찾아가겠다며 호텔 앞 공동묘지를 헤매며 막무가내로 힘을 쓰는 엄마는 이미 내가 알던 존재가 아니었다. 마침 동행하던 아저씨들 두 분을 아버지 친구 분으로 착각하신 엄마가 그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두 시간 만에 간신히 호텔로 들어가셨고, 가이드가 가지고 있던 수면제를 얻어 드시게 해서 엄마를 간신히 잠재울 수 있었다. 


그 두 시간 동안의 나와 엄마의 사투는 호러 장편소설감이다. 그러나 사태는 이미 수습불가로 심각해져 있었고, 엄마의 가슴에 아름다운 풍경 한줌 넣어 행복하게 해드리겠다던 나의 계획은 무산되었음은 물론 나도 엄마도 이미 지옥문 안에 들어서있음을 알았다. 


도저히 그 상태로 엄마와 여행을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비행기 티켓 몇 백만원의 손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국에 돌아가서 병원에 모시고 가는 것이 더 급선무였다. 그래서 가이드에게 바로 다음 날 드보르니크에서 출발하는 직항편 티켓을 새로 끊어달라고 했다. 어쨌든 비행기가 뜨는 6시까지만 잘 버티고 가이드에게 얻은 수면제를 드시게 해서 비행시간 동안 또 주무시게 하면 병원까지 가는 정도의 회복은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잠에서 깬 엄마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씀하셨다. 


“ 내가 누구여? 내가 그래도 임씨 가문에서 얌전하고 똑똑하기로 유명했던 김과장님 사모님인데 비행기 타고 여기까지 와서 좋은 곳 구경은 한번 하고 가야지? 그렇지? 어뗘? 엄마 화장하고 이 옷 입으니까 이쁘냐? 안 이쁘냐? ”


마음이 좀 놓였지만 근원적인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도 너무 미안해서 생수를 사서 버스 안에 있는 30여명의 관광객들에게 돌렸다. 어짜피 저녁 비행기를 탈 것이니 드보르니크 시내 관광만 잠깐하고 오후에 비행장으로 이동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엄마가 점심 식사 후 얼굴이 노래지시면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비행기를 탈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러니 사진 속에서 핫핑크색 옷을 입고 있는 엄마의 웃음도, 브이 자를 그으며 웃고 있는 나의 웃음도 모두 거짓 웃음일 뿐이었다.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었다. 


불안이 인간을 어떤 식으로 고통을 주고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지를 나는 아마도 그 때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다. 무엇도 내 맘대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바로 수치심을 낳고 불안을 낳고 부정적인 사고의 틀에 삶을 가둔다. 그것이 곧 불행이고 고통이다. 어쩌면 엄마는 1934년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의 역사적 소용돌이는 물론 여자로 태어나고, 동생들 돌보느라 학교도 못가고,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면서 끝도 없는 무력감으로 좌절했었을지 모른다. 삶은 당신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체념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엄마 삶에 화려한 한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식들의 눈에 엄마는 남편에게 사랑받는 비교적 편안하고 멋진 삶을 살고 계셨다


그러나 엄마가 살았던 시대의 가슴 아픈 시절인연들과 아들을 두 번 앞세운 엄마의 무너진 가슴은 삶에 대한 긍정보다는 부정의 기억을 더 많이 확장시켰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낯선 이국땅의 공동묘지에서 아들에게 밥을 차려주러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아 헤매셨던 것일까? 아들의 생명을 지킨다는 것이 엄마에게 그토록 절실하고 치명적이었던 것일까? 밥을 먹여 아들을 지키고 살려야한다는 단 하나의 절대적 사명감이었을까?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며 자신이 디자인한 방식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감을 말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에 깨어 있어야한다. 살인 폭행 도둑질 등등 도덕적으로 금기시 되는 일들만 아니라면 남들 눈치 보지 말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상을 짓지 말라고 말씀 하신 이유도 상식과 보편적 일반화에 대한 위험성을 감지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다 같은 사람이지만 다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그 잣대가 일원화 되어 누군가의 평가를 받거나 타자의 삶을 따라가려 하다보면 결국 불행한 삶의 길을 걷게 되고 마는 것이다. 자신만의 독자적 삶의 길을 만들고 그냥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고요히 걷는 것이 어쩌면 해탈이리라.


깨달았다면 강을 건너며 타고 온 뗏목도 과감히 버려야한다 말씀하신 부처님의 말씀이 바로 자신만의 삶을 창조해서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삶의 행복을 말 씀 하신 것은 아니었을까?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이유도 어쩌면 하루하루를 스스로 창조적 삶으로 만들어가는 인간 존재의 창조적 능력과 본질 그 자체가 신과 같음을 간파했던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린 모두 지배구조의 시스템에 훈련된 노예적 삶을 살아간다. 매트릭스의 규칙에 어긋나면 당장 색출당하고 손가락질 당하며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엄마의 불안 또한 거기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친구들 모두 학교를 가는데 나만 가지 않으면 바로 놀림감이나 웃음거리가 되고 그들과의 대화와 놀이에 끼어들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울 것이 없어도 친구를 만나기 위해 학교에 가고 미래 학교의 역할 또한 친구 만들기 딱 한가지 일지도 모르겠다. 친구가 없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혼자 고독해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혼족의 시대가 가능해진 것도 디지털 플랫폼이라는 가상공간에서 채팅으로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엄마가 겪은 섬망증세는 사실 좀더 엄격히 따져보면 현대인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디지털 환각의 수준과 다르지 않다. 더 깊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롭지 않다는 착각과 환각을 IT과학기술을 통해 사회 시스템화하여 훈련되어지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엄마와 버스에 나란히 앉은 나와 딸과 차에 나란히 앉은 나의 존재는 사실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대상과 함께 하는 시간들은 또한 같은 세상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보르헤스의 알렙이나 어린왕자의 밤하늘에 뿌려진 수 많은 별들 모두가 개별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과도 같다. 우린 모두 작은세계이며 같을 수 없다.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지배 시스템은 우리에게 같을 것을 강요하고 주입한다. 만약 엄마가 엄마 또한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반짝이는 단 하나의 별임을 스스로 알고 인정했다면 무학의 수치심 따위는 범접하지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학교에서 배우는 학습내용 이상의 것들을 동생을 키우고 부모님을 도와 집안일을 하면서 스스로 깨쳤고 자식들을 성장시키며 맞은 삶의 다양한 굴곡에서 더 많은 공부를 하며 스스로 깨친 빛나는 라이프스타일 디자이너임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든든하고 당당했을테니 말이다.


 내 별에서 내가 왕이고 정답임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 아닌가? 타자의 시선이 개입될 여지조차도 없이...  그렇다면 난 엄마에게 싸다구 맞아 저토록 얼굴이 붇지 않았어도 되었을텐데.... 하하하. 그냥 큰 웃음이 나온다. 엄마도 나도, 그리고 이 지구별에 사는 우리 모두의 삶이 갑자기 인간의 손가락 체온만으로도 화상을 입는다는 바다거북 새끼의 연약함처럼 가여워 웃음이 나온다. 그 작은 새끼 거북의 걸음이 새겨놓은 모래 위 갈지자 발자국이 바로 우리 삶의 연약함 아니겠는가? 파도가 닥치면 다시 또 지워지고 사라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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