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은형 May 21. 2023

출판사 대표가 되어 첫 책을 내어 보니..10

 중노동에 지쳐 낮잠을 자고 초저녁에 일어나 마주한 바람은 달랐다. 

어두운 밤의 틈새를 비집고 한 번은 차고 또 한 번은 온화하게 마치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듯 불어오는 그것은 단순한 공기의 흐름이거나 리듬이 아니라 나를 새롭게 깨우는 하나의 기운이요 움직임이요 차지도 덥지도 않은 새로운 흐름이었다.      



여주에서 ’ 수라 기쁠희 mini 삼첩반상기‘ 세트와 포장재 싸바리를 실은 트럭이 도착했다는 전화가 오자마자 1층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하필이면 단지 전체 페인트 공사 중이라 집 현관 입구로 들어오는 길이 모두 막혀있었다. 차주들과 공사 책임자를 모두 찾아 양해를 구하고 차가 도착한 지 20분 만에 집 현관 앞에 트럭을 대고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트럭 기사분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건장한 체격이시나 과로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신체적 징후가 얼굴에 또렷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차마 2층까지 그 무거운 도자기 박스를 모두 옮겨달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려웠다. 결국 건강 음료를 챙겨서 드리고 빈 트럭을 여주로 출발시키고 난 후에야 혼자서 2층까지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12시부터 시작한 짐 나르기가 3시 30분이 넘어서 끝날 때까지 나는 태산을 오르는 수행자의 기분으로 2층 계단을 아마도 60번은 족히 오르내린 것 같다. 


무거운 도자기를 덜어내어 들고 2층 계단을 오르다 보면 나도 몰래 힘들어서 누군가 날 도와주러 올 사람이 있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리스트를 막 훑고 있는 의존적이고 유아적인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다시 아파트 현관 바닥에 주저앉아 멍 때리고 쉬다 보면 선택과 결정에 따른 과보와 책임을 스스로 지는 것이 바로 사업이고 리더의 일이라는 내면의 소리가 들려오면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어나 계단을 올랐다. 


비록 1인 기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하나 누군가에게 의존해서 자신의 일을 미루는 어리석은 존재가 되어서는 성장도 없다는 생각으로 2층 계단을 올랐다 내려오는데 택배 기사님과 마주쳤다.      


“ 아이고... 여자분이 혼자서 저 많은 짐을 어떻게 나르세요? 트럭 기사님께 좀 도와달라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어쩌죠? 제가 시간은 없지만 무거운 것 하나라도 날라 드리고 갈게요.” 

“ 아니에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하고 너무 감동이에요. 제가 천천히 조금씩 나르면 돼요. 바쁘실 텐데 얼른 가셔요,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     


와... 정말 너무너무 감사했다.

택배기사님의 측은지심과 따뜻한 말씀 한마디가 나에게 새로운 용기를 채워주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 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돈키호테가 깜깜한 몬테시노스 동굴에서 만난 두란다르테가 말했던 것처럼

  ’ 인내심을 가지고 카드 패를 뒤섞으며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야 할 순간' 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정말 다리가 풀리자 얼마 전 비즈니스 멘토가 선물하신 몰트 위스키 ’Arran‘을 따서 한 시간에 한 잔씩 홀짝거리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알코올은 생각보다 힘이 세서 한계에 이른 내 체력과 육체적 고통을 조금 지연시켜 주었다. 그러나 가장 무거운 도자기 상자가 5개쯤 남게 되자 악마의 속삭임은 오히려 더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옆쪽 라인에서 페인트칠을 하고 계시던 페인트공들에게 하나씩만 들어 달라고 할까? 그러면 한 번에 일이 끝나는데? 아님 같은 동네 사는 지인들에게 도와달라고 전화를 할까? 등등의 유혹이 날름거렸다. 하지만 나에게 소중한 휴일 시간이 타인에게도 소중한 것은 말하나 마나이지 않은가? 


과제가 산더미처럼 많은 순간보다 과제가 끝나갈 때 더 정신을 집중하고 자신의 태도와 자세에 더 깨어있어야 함을 알았다. 



결국 혼자서 버티기로 간신히 결심하고 마지막 상자를 다 올리고 샤워실로 거울을 보니 얼굴이 벌건 일본원숭이 같은 존재가 쪼글쪼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자마자 수면제 삼아 밥숟가락에 위스키를 조금 따라 마시고 4시부터 깊은 낮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뜨니 사방이 고요한 깜깜한 밤이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하루 종일 꿈을 꾼 느낌이랄까? 아니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랄까? 그제야 비로소 싸바리 패키지 포장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감격스러웠다. 수많은 장애와 좌절과 막막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으니 인간승리이지 않겠는가?



돈을 번다는 유일한 목표를 지향하는 사업이란 측면에서는 비록 손실과 비전이 불투명하지만 예술적 감각의 성취와 비즈니스 모델링과 창업 스터디로서의 감각적 성취는 스스로 만족스럽다. 

준비하는 5개월 동안 정말 많은 공부를 했다. 


초저녁에 깨여 글을 하나 마무리하고 밤바람에 흔들거리는 오렌지 꽃향기를 따라 베란다 의자에 앉았다. 이른 봄에 꽃을 몇 송이 피워 올리더니 열매를 맺지 못하고 져버린 오렌지가 다시 싱싱한 꽃들을 수도 없이 피워 올리며 집안이 오렌지 향으로 가득하다.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밤바람의 틈새에 어쩌면 작은 열매 하나 맺힐 소식이 전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젯밤바람과 함께 내 존재는 깊은 동굴의 심연으로 내려간 돈키호테처럼 고요하고 맑고 가벼웠다. 어쩌면 땀을 흘리고 잠으로 휴식을 취한 때문이었을까? 나도 돈키호테가 당나귀 울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듯이 늦은 시간까지 독서를 즐기기까지 했으니 참 놀라운 밤바람이다.   

   

“ 세상에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희귀한 재주들이 존재한다는 것일세. 그런데 이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로 인해 그런 재주들이 제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지. ”  

   

” 마땅히 찬양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만큼 찬양받지 못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시여! 그대는 낙심한 자에게는 용기이자, 쓰러지려 하는 자에게는 비호이며, 넘어진 자들에게는 팔이고, 모든 불운한 자들의 지팡이자 위안이시라! “   

  

”시간과 순간을 아는 일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속한 것이며 그분께는 과거도 미래도 없고 모두가 현재뿐이라네. “     


어두운 밤의 틈새를 비집고 한 번은 차고 또 한 번은 온화하게 마치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듯 불어오는 그것은 단순한 공기의 흐름이거나 리듬이 아니라 나를 새롭게 깨우는 하나의 기운이요 움직임이요 차지도 덥지도 않은 새로운 흐름이었다. 


어쩌면 난 오늘, 징징대는 아이가 아닌 진짜 어른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출판사 대표가 되어 첫 책을 내어 보니..9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