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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메밀 Nov 04. 2019

우유부단한 사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요

우유부단한 사람


난 참 우유부단한 성격이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결단력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사람은 누구나 우유부단한 면을 가졌구나, 하고 다시 생각한다.


카페에 가면 따뜻한 아메리카노 혹은 페퍼민트 티 혹은 자몽에이드를 마신다. 카운터 앞에서 고민할 가짓수가 적으니 꽤 빨리 주문하는 편이다.


단 둘이서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친한 후배 한 명이 있는데, 나 못지않게 꽤나 우유부단한 친구다. 둘이 만나서 나오는 의견이라 봐야 몇 개 되지 않으니 저녁 메뉴의 고민 따위나 어느 카페를 들어가 수다를 떨지, 커피 대신 맥주 한잔이 나을지, 이런 문제의 처리가 빠를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요 말하는 후배 때문에 골머리 앓은 게 한두 해가 아니다. 짜장면을 먹을지 치킨을 먹을지 결정권자가 된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이런 날들이 반복되자 노하우가 생겨 만남 때마다 선택지를 2,3개 정도로 추려서 가져갔다. 치킨 먹을래, 삼겹살 먹을래? 이정도 선택지에서도 후배는 여기도 좋고 저기도 좋아요 라고 말해 곤욕을 치르게 했다. 결국 막중한 책임을 떠안은 선배가 치킨으로 결정하면, 그때부터 우린 양념을 먹을지, 간장을 먹을지, 반반을 먹을지 고민에 빠졌다. 결단력 없는 둘이 만나 저녁 메뉴 고른다고 헤맨 시간이 합하면 얼마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긴 건 우유부단한 우리가 케미가 끝내준다는 것이다. 길바닥에 버리는 시간 따윈 없다. 서로 배려랍시고 다 좋아요, 나도 다 좋아하면서도 즐겁기만 한 방황의 시간을 보냈기에.


잦은 휴학으로 뒤늦게 졸업하는 후배를 축하하기 위해 만남을 가졌다. 기대치보다 높은 퀄리티의 졸업작품을 완성한 걸 보니 새삼 감탄했다. 얘가 이렇게 잘했나 싶어 놀라기도 하고, 해준건 없어도 왠지 대견스럽고 뿌듯해서 한편으로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젠 나보다 더 바쁜 후배를 위해 전시장 근처의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점심을 산다며 근처의 중식당에 데려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식당과 메뉴를 단시간에 결정하는 모습을 보니 미리 준비한 건가 싶기도 하고, 전시장 근처라 빠삭하게 아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것도 아니면 안 본 사이에 얘가 변했나도 했다. 별 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이냐고 하는 분도 더러 있겠지만, 몇 년간 후배의 우유부단한 모습을 꾸준히 봐온 나로서는 기억에 각인될만한 날이었다. 우유부단한 나를 좀 이끌어줬으면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생각인데, 다음 만남부터는 좀 편해졌으면 좋겠다.


우유부단함은 모든 면에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유부단한 사람’이란 없다. 특정 면에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일 뿐이다.


주변의 지인들은 내게 좋고 싫음이 분명하다고들 말한다. 그때마다 꾸준히 “제가요? 정말요?” 하는 리액션을 빼먹지 않는다. 우유부단하고 취향이 흐리멍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온 세월이 짧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취향이 확실하고 어물쩡거리는 일 없이 좋다, 싫다 결단을 쉽게 내리는 사람으로 비치기도 한다. 이렇게 가끔씩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을 타인을 통해 알아가는 게 흥미롭다. 내가 알던 나의 모습과 타인이 날 바라보는 시각이 합쳐져 입체적인 나를 알아가는 게 인생이 아닐까.


나는 여전히 우유부단한 면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본인을 소개할 때도 더러 있다. 미리 말하지만, 저는 결정장애가 있어요.

우유부단함이 매력적인 표현이 되는 날이 오면 좋겠다. 넌 우유부단한 게 매력이야, 라던가 이상형으로 ‘우유부단한 점이 많은 사람’을 말하는 사람들이 생겼으면 좋겠다. 우유부단한 사람들을 곁에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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