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말문이 막 트인 둘째는
몇몇 단어들을 거꾸로 말합니다.
가방은 바강이 되고,
두부는 부두,
나무는 무나가 되지요.
제가 보기에 일부러 뒤집는 것 같지는 않아요.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사뿐히,
그렇게 말하거든요.
아이의 입속에서 순서가 뒤바뀐 말들은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모양을 하고 나옵니다.
저는 그런 아이의 말들이 모두 좋아요.
그 엉뚱한 수고로움이 귀엽습니다.
예래야.
'가방' 해봐.
- 바강
예래야.
그럼 천천히 말해볼까?
'가. . . 방' 해봐.
- 바. . . 강
아니 아니, 예래야.
가!
방!
- 바!
강!
빨리도 해보고, 천천히도 해보고,
큰 목소리로 말해봐도, 가방은 바강입니다.
게다가 아이는 사뭇 진지해요.
저는 뒤집어진 그 말들을 계속 듣고 싶어서
아이 곁에 바짝 붙어 그 재밌는 소리들을 듣습니다.
나의 말과 아이의 말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아요.
그 말들에는 나의 흐뭇한 미소도 묻어 있고,
뒤집어진 말들을 바로 놓아주는 손길도 묻어 있고,
이윽고 제 모습을 찾은 모습을 기뻐하는
내일의 저도 묻을 테지요.
그렇게 아이의 뒤집어진 말들 여기저기에
오늘의 우리가 묻습니다.
가운데로 몰린 저 까만 눈동자가 제 위치를 찾고,
거꾸로만 신던 신발을 혼자서도 잘 신게 되고,
뒤집어진 말들이 보기 좋게 제자리를 찾으면,
엄마의 자리는 조금씩 작아지는 걸까요?
나중에, 아이가 많이 자란 나중에,
이 작은 순간들이 일렁이면,
이 시간들이 그날의 나에게로 당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엄마는
부지런히 아이의 구석구석에
오늘의 엄마를 묻혀 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