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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Mar 28. 2021

자라나는 것들

우리는 함께, 자라나는 중입니다.



아침 일곱시.

열두 살의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전화벨이 울리기를 기다린다. 아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에 내가 무너져내리는 일이 없도록, 있는 힘을 다해 나를 붙들고 서있는 것이다. 따르릉이었는지 델렐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소리는 사정없이 날카로웠고, 모멸적이었으며, 절망적이었다.



"집으로 데리러 와."


"응..."



나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는데, 전화기 너머의 그 여자아이는 나를 따돌리는 무리 중에서 제일 무서운 아이였다. 엄마가 눈치채지 않도록 아무렇지 않은 척 전화를 끊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그 아이의 집은 우리 집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었고, 나는 거기서 그 아이가 학교 갈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그 아이 옆에 서서 다시 20분을 걸어서 학교로 가야 했다. 10분이면 충분했던 나의 등굣길은 그렇게 한 시간을 채우고서야 끝이 났다. 나는 무서웠고 슬펐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았다.


그렇게 나는 열두 살과 열세 살을 살았다.

그 어두운 시절을 기어코 살아냈다.







어떤 소리는 몸이 된다. 무서운 눈과 거친 손발을 휘두르는 거대한 몸뚱어리가 된다. 그 전화벨 소리는 사라진지 오래지만, 언제라도 나를 덮칠 짐승이 되어, 내 안 깊은 곳에 웅크리고 앉아있다.


내가 전화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도, 초인종 소리에 잔인한 생각들이 스치는 것도 다 그 짐승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었는데, 그전까지 나는 나의 청력이 보통 사람보다 좋아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사소한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면서 20년이 넘는 세월을 산 것이다. 오죽했으면 아빠한테 혼이 날 정도였다. 그렇게 소리 하나하나에 놀라서 어떻게 사냐고 애가 타 하셨다.


4년 전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내가 살아오면서 무서웠던 순간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나의 인생을 돌아보고 있었는데, 그 기억들이 하나같이 소리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참을 그 기억들 속에서 헤매다가 한 장면이 섬광처럼 눈앞을 스쳤다. 그 날카로운 소리가 다시 되살아나 내 온몸을 뒤흔들었다. 내 마음의 그늘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그 짐승을 목도한 것이다. 소리에 대한 트라우마는 그 기억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아... 그래서 그 소리들이 그렇게나 무서웠구나...!'



탄식, 억울함, 나에 대한 안쓰러움,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가 뒤섞여,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이 차올랐다. 열두 살의 내가 미쳐 다 토해내지 못했던 그 울음이 아직 내 안에 고여 있었다.







그 소리는 이제 여기에 없다. 그 시절의 나도 없다. 내 몸의 세포 하나조차 그날의 내가 아니다. 그러니 그 기억은 이제 찢고 구기고,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서 휴지통에나 처넣어버려야 마땅하다. 그것에 내가 휘둘릴 일말의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아직 고여있는 울음들을 퍼내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제 마음에 달린 창문을 열수 있을 만큼 자랐고, 그 방을 깨끗이 청소할 수 있을 만큼의 힘도 생겼다. 나는 부지런히 내면의 풍경을 가꿀 것이다. 아름답고 고운 것들로 그 풍경을 채워갈 것이다. 고여있는 아픔과 슬픔을 퍼내고, 그 아픈 자리에 햇볕을 쬐어주고 바람을 오가게 할 것이다. 그리고 새를 초대해 함께 노래할 것이다.







자라나는 것들




아가

너는 이제 충분히 자랐단다

저기 저 창문을 열어

쏟아지는 햇살에 세수를 하여라



아가

너는 이제 충분히 자랐단다

저기 저 문을 열고 나가

흐르는 냇물에 발을 담구어라



아가

너는 이제 충분히 자랐단다

너의 맑은 가슴으로

네 두 아이를 끌어안아라



아가

너는 이제 충분히 자랐단다

그 고운 아이의 엄마가 되었단다



아가

이제 너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충분히 아팠고 충분히 자랐단다

그러니 이제 너는 사랑을 하여라








저를 꼭 닮은 큰 아이는

엄마의 아픈 마음까지 꼭 빼닮았습니다.

온갖 소리들이 난무하는

이 세계가 아직은 많이 조심스럽지요.

그래도 아이는 용기를 내어 걸어 갑니다.

엄마 손을 잡고.

아빠 손을 잡고.



엄마와 아이는 이렇게

함께 자라나는 것들이 되어

나란히 성장통을 겪고 있습니다.



아이는 무엇으로 자라나게 될까요.

엄마는 무엇으로 자라나게 될까요.



우리는 오늘도,

함께, 자라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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