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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Feb 13. 2016

스큐어모피즘의 추억


나는 근본적으로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첨단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면서도 그런 감성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메모를 하려고 화면을 켜면 수첩이 있어서, 원하는 곳을 펼치고 거기에 펜이나 타자기로 메모하는, 그런 것 말이다. 그런 현실의 소소한 모사를 보면 감탄스럽고 정이 간다. 내가 아이폰을 좋아했던 것도 그런 ‘스큐어모피즘’ 때문이었다. 메모장은 가죽 케이스 안에 들어 있었고, 음악이나 팟캐스트 등 많은 앱이 실제로 존재해서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버튼을 달고 있었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아이패드 앱 중에는 “beatblaster”라는 것이 있는데, 이 앱은 오디오데크 자체를 모사해서 같은 음악을 CD로 재생하는 듯한 애니메이션을 볼 수도 있고, 턴테이블로 재생하는 듯한 애니메이션을 볼 수도 있다. 음악 목록을 열면 장에 빼곡히 꽂아놓은 CD 케이스의 옆면이 나타난다. 게다가 모사한 게 디자인 뿐만이 아니라 음악을 턴테이블로 재생하면 음악 중간중간 바늘에 먼지가 스치는 잡음도 들을 수 있어서, 이걸로 음악을 틀어놓으면 턴테이블이 돌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잡음이 더 들려오지 않을까 이제나저제나 멍하니 기다리게 된다(사실 이건 약과고, 이보다 더 턴테이블 구현이 잘 된 앱도 많다고). 나는 이런 디자인으로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실감을 하는 게 좋고, 거역할 수 없는 디지털화로 인해 잃어버려야 했던 질감을 재치있는 고증으로 디지털 기기 속에 되살리는 것이 기술이 줄 수 있는 감동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beatblaster의 모습. 오디오 데크를 만져봤다면 어딜 어떻게 조작해야 할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그러나 iOS 7에서부터 ‘플랫 디자인’이 적용되면서 아이폰은 더 이상 예전의 아이폰이 아니게 되었다. 모든 것이 아주 납작하고 심플해졌다. 기능상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날아간 것 같다. 예전의 디자인이 뼈대 위에 살을 입혀놓은 것이었다면, 플랫 디자인은 살을 없애고 뼈대를 예쁘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에 대해 이것이야말로 심플함의 정수고, 현실 모사만을 반복해온 스큐어모피즘에서 벗어나 진정한 예술, 모더니즘으로 나아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이폰을 쓰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이게 그렇게 예쁜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바로크 가구를 아주 잘 쓰고 있었는데 집주인이 와서 멋대로 이케아 가구로 바꿔놓고 이거야말로 현대 예술이고 앞으로 가구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주장하는 꼴을 보는 기분이다. 


예를 들어 가장 자주 사용하는 ‘음악’ 앱을 보면, 이제 흰 평면에 앨범 재킷이 덩그러니 떠 있고 그 아래 탐색바가 있다. 그 아래는 아티스트와 제목이 떠 있고, 그 아래에는 이전 곡, 재생, 다음 곡 아이콘이 아무 테두리 없이 역시 덩그러니 허공에 떠 있다. 그 아래에는 볼륨 조절 바가 있고, 그 아래에는 “이 재생목록 반복”, “생성”, “전체 임의 재생” 따위가 글자로, 기껏해야 핫핑크색 배경을 두른 모양으로 둥둥 떠 있다. 예전에 비하면 이건 그야말로 개념을 실체 없이 그대로 배치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애플이 디자인한 만큼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가 만든 레이아웃이고, 누구나 극찬할 심플함의 미학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과 내 의견은 완전히 별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특히 아이콘을 넣는 대신 핫핑크 글씨로 “이 재생목록 반복”, “생성”, “전체 임의 재생”을 넣은 부분은 도저히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없다. 심지어 설정을 바꾸려고 이 글씨를 누르면 아주 친절하게도 “반복 끔”, “이 노래 반복”, “이 재생목록 반복” 따위 선택창이 떠서 화면의 3분의 1을 가려 버리는데, 이쯤 되면 아름다움의 기준이 뭔지도 잘 모르겠다. 차라리 나머지 아이콘도 다 빼고 “이전 곡”, “재생”, “다음 곡” 따위 글자로 바꾸어 놨으면 재미있어 보이기나 했을지도 모르겠다. 


(깔끔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최신 iOS 음악 앱 디자인.)



(예전의 음악앱 디자인. 나는 이 형체 있는 버튼들이 그립다)


타이머 같은 앱에서 시간을 설정하는 방법도 아주 심플하게 변했다. 예전에는 정말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계수기처럼 생긴 원통을 차라락 회전시켜서 시간을 맞췄는데, 이제는 그 디테일은 사라지고 숫자만 남았다. 그런데 우습게도 회전시키는 방법 자체는 여전해서, 개념으로서 존재하는 숫자들을 빙글빙글 돌려 원하는 숫자를 가운데 맞춰야 한다. 완전한 아날로그도 디지털도 아닌 체계의 형체 없는 원통은 꿈속을 떠도는 로또 번호처럼 실체가 희미하다. 



(진짜 기계를 조작하는 느낌이 드는 디자인)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요컨대 플랫 디자인이라는 대세가 시작되면서 시스템은 현실을 박차고 아무것도 모사하지 않는 개념적 세계로 들어선 셈인데, 이게 정말 바람직한 움직임이었는지, 비전문가인 나로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 ‘플랫’, ‘심플’, ‘모던’함이 지향하는 바가 아름답다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희한하게도 정말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건들, 이를테면 계산기나 책상 따위가 이런 방식으로 디자인되었다면 나는 그걸 꽤 좋아할 것이다. 그런데 왜 디지털에서는 이걸 좋아할 수 없는가? 사실 명백한 이유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단순히 실체를 가진 물건은 실체를 버리려 하는 게  멋져 보이고, 실체가 없는 프로그램은 실체를 가지려 하는 게 멋져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나마 확실한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심플함이 사용의 직관성, 편의성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디자인의 큰 특징 중 하나는 ‘글자를 누르는 경우가 늘었다’는 것인데, 예전에는 대체로 명확히 알아볼 수 있는 아이콘이나 레버, 버튼을 누르는 방식이었으므로, 나는 이게 사라져버린 뒤 처음으로 음악 앱을 실행했을 때, 화면 맨 아래 뜬 “전체 임의 재생” 따위의 글자들을 보고 ‘설마 임의 재생 모드를 바꾸려면 이 글자를 누르라는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다. ‘계기판’과 ‘버튼’의 구분이 희미해진 것이다. 어쨌든, 그 글자를 누르는 게 맞았다. 맙소사. 한 버튼에 기능이 하나씩 붙은 구형 리모콘만 쓰다가 스마트 TV리모콘을 만지게 된 기분이었다. 


물론, 이것은 오로지 옛날부터 실체가 있는 기기를 만져오고, 그것을 모사한 시스템에 익숙해진 사람이기에 하게 되는 불평일 따름이고, 그런 기기와 별 인연 없이 첨단 디지털 기기부터 만지고 살아온 세대는 이런 개념적 세계가 그저 멋지고 익숙하기만 할지도 모르겠다. 또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발표할 때, '실물 키보드를 채용했다가 나중에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어떡할 거냐’고 지적했듯이, 실체를 모사한 디자인은 당장 지금부터 등장하고 있는 ‘실체로 존재한 적이 없는 시스템’을 표현하는데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실체에 묶여 있기에는 시스템의 가능성은 분명히 너무나 거대하다. 그러니 이 디자인이 실체를 떠나 개념으로 향하는 인류의 진화 과정에 있는 거라면 따를 수밖에 없다. 


다만, 그런 거창한 의의가 있든 없든 내 취향까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앞으로도 iOS 7이후에 도입된  디자인을 라면에 푼 계란의 테두리처럼 종잡을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고, 같은 기능의 앱이 있다면 허공에 글자와 그림과 아이콘을 뿌려놓은 앱이 아니라 당장 차가운 버튼과 레버를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앱을 쓸 것이다. 레이저총과 리볼버가 있으면 리볼버를 집는 것처럼. 나는 아날로그를 사랑하니까.


(2015.02.18.)



-후기


애플에서도 이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요즘 들어서는 아시다시피 임의재생과 반복재생이 아이콘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로서는 무척 반가운 일이었죠. 그렇습니다만 스큐어모피즘으로 돌아선 것은 결코 아니라서 여전히 심상의 공간에서 개념적 컨트롤러를 만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제는 익숙해져서 음악을 들을 때마다 불만을 느끼지는 않는데, 메모나 다이얼 같은 툴은 애착이 많았기에 섭섭함을 느끼곤 합니다 .아마 이런 집착이 미래와의 차이를 만드는 거겠죠. 그리고 이런 집착은 실물에 대한 추억 때문에 나오는 것이니까, 요즘 태어나서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모바일 기기를 쥔 세대는 이런 식의 집착을 느낄 일이 절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세대는 2030년쯤 되면 스마트폰 초기의 2차원 디스플레이를 충실히 구현해서 감성에 호소하는 복고풍 디바이스를 좋다고 하겠죠. 어휴. 


아무튼 완전히 마음에 드는 UI를 만나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2016.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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