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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Feb 10. 2016

때로는 펜을 쓰고 싶다


고등학생 때의 나 자신에게 찾아가서 “넌 어른이 되면 펜을 하도 안 써서 펜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거야”라고 하면 어린 나는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라면서 개뿔만큼도 믿지 않겠지만, 그건 사실이다. 요즘은 뭐든 키보드나 터치패널로 기록하니까 도통 펜을 쥘 일이 없는 것이다. 펜을 쥐는 것보다 카드를 쓰고 서명한다고 스타일러스를 쥘 때가 더 많다. 


2005년만 해도 다이어리도 일기도 손으로 써서 연말이 되면 새 다이어리와  일기장을 사는 게 굉장한 보람이었으므로 나는 내가 언제까지고 그런 생활을 계속 할 줄 알았다. 나는 아날로그를 꽤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2006년에 전자사전으로 쓸 수 있으면서 장문의 텍스트를 입력할 수 있는 모바일 기기를 찾다 PDA를 사면서부터 이런 아날로그 기록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다이어리도 일기도 디지털로 처리하게 된 것이다. PDA라는 게 대중적인 기기는 아니었으니까 일상적 기록의 디지털화를 남들보다 비교적 빨리 체험한 편이다. 


아무튼, 그 뒤로 아이폰이 등장하고,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이건 나에게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흐름이 되었고, 이후로 아이패드까지 영입하면서 나는 수업 필기까지 디지털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메일의 등장으로 편지를 손으로 쓸 일이 거의 없게 된 것처럼, 펜도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이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2006년에 산 펜을 아직 반도 쓰지 못했다. 교과서에 부연 설명을 적을 때 쓰는 녹색 펜이라 특히 쓸 일이 없긴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더욱 심각한 것은 앞으로도 이 펜을 쓸 일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내가 갖다 버리거나 누구에게 주지 않는 이상 이 펜은 반도 쓰지 않은 채로 무덤까지 가지고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필통에서 그 펜을 꺼내 서랍 속에 쑤셔 넣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필통 자체가 쓸모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제 내 필통에 남아 있는 것은 검은 펜 둘, 파란 펜 하나, 샤프 하나, 지우개 하나, 면도칼 하나, USB 메모리와 아이폰 케이블뿐이다. 단출한 구성이지만 줄이려면 더 줄일 수 있다. 부연 설명을 적을 일이 없으니 파란 펜도 필요 없고, 지울 수 있는 기록을 할 일도 없으니 샤프와 지우개도 필요 없다. USB 메모리와 아이폰 케이블은 요긴한 물건이니 버릴 수 없고, 면도칼도 옷에서 삐져나온 실밥을 제거하는 데 유용하니까 놔두자. 어쨌든 필기구는 결국 검은 펜 하나만 있으면 불편할 게 없는 셈이다. 


정말, 고등학생 때라면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때는 이상할 정도로 필기구에 열광하는 애들이 많아서, 다들 해외여행을 처음 하는 부모님이 가방을 싸듯이 필통에 온갖 잡동사니를 쑤셔 넣고 다녔다. 파이롯트 사의 하이테크 C를 기본으로 네 가지 정도 장비했고, 통칭 사쿠라라고 불린, 젤리롤인가 하는 펜도 몇 개나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대부분 허리를 잘라 짧게 만들고 책갈피에 꽂는 부분을 세 번 접어 방아쇠처럼 당기고 다녔다). 연필도 진한 것, 옅은 것을 따로 마련했고, 연필이 있으니 칼이나 연필깎이와 지우개가 따라왔고, 거기에 샤프심, 수정테이프, 형광펜, 색연필까지 거의 기본 장비였다. 그리고 그것들로 수업 시간에 필기한 내용과, 선생님이 말해준 내용과, 자기가 생각한 내용 등등을 모조리 다른 색으로 기록하곤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체 무슨 짓이었나 싶지만, 그때는 다들 그런 아기자기한 재미를 좋아했고, 또 즐겨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뭔가를 기록할 일도 좀처럼 없어서, 기껏해야 도서관에서 책 위치를 메모하는 정도다. 이제 그것조차 프린터가 설치되어 하지 않게 되었지만.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 보면, 그때 그 호화로운 필기구 생활의 흔적들이 아직도 제법 남아 있다. 형광펜도 색깔별로 굴러다니고, 색연필도 꽂혀있고, 네임펜도 몇 개나 있다. 연필도 그걸 때서 겨울을 날 수 있을 정도로 많다. 멀쩡한 것을 버릴 순 없으니 써서 없애야 할 텐데, 요즘 페이스 대로 이걸 다 쓰자면 이것들을 써서 없애기 전에 컴퓨터와 기계가 반란을 일으켜 인간들의 정신은 전뇌공간에 가두고 육체는 배터리로 쓰는 시대가 먼저 올 게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필기구를 쓸 일은 확실히 없겠군.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이 필기구라는 것이 어쩐지 어디선가 하나둘 생겨나기 마련이라 쓰는 속도보다 생성되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어쩌다 판촉물을 받아오고 설문조사 사은품 따위를 받아오다 보니 프링글스 통이 필기구로 가득 찼다. 최근에 이케아 광명점에서 사람들이 연필을 무더기로 집어와 화제가 되었는데, 나는 오히려 연필을 놓고 오고 싶을 지경이다. 쓰지도 못할 물건을 갖고 있어서 뭐하겠는가?


그러나 그런 한편, 아날로그 필기구로 뭘 쓰고 싶다는 욕구도 분명히 있다. 필기구로 직접 글을 적는 행위에는 생각이 지면으로 옮겨지는 동안 그 글이 다시 자신의 생각에 입력되는 여유와 되새김질이 있다. 그래서 그렇게 쓴 글에서는 내용 이외의 감정이나 감성을 짙게 느끼는 것이다. 


만년필로 쓰면 더 좋다. 만년필이란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라 내용에 상관없이 쓰는 것만으로 쾌감을 준다. 펜촉과 종이가 마찰하여 사각거리는 만년필 특유의 느낌은 다른 필기구로 도저히 대체할 수 없다. 기도를 자극하는 담배를 다른 무엇으로 대체하기 힘든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재작년 겨울에는 별로 쓰지 않을 걸 알면서도 나에게 만년필 한 자루를 선물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네이버 포스트 초대작가가 되면서 그보다 더 좋은 만년필 한 자루를 선물 받았다. 덕분에 틀림없이 기뻐야할 선물이 묘하게 씁쓸한 선물이 되고 말았는데, 아무튼 내가 예상한 대로 두 만년필 다 놀려두고 있다. 이따금 손이 근질근질하면 메모지에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나 “다람쥐 헌 쳇바퀴에 타고파” 따위를 아무 의미도 없이 끄적일 따름이다. 람보르기니를 타고 아파트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보며 만족하는 수준이다.


언젠가는 아무리 악필이라도 패턴을 분석해서 텍스트 파일로 저장하는 기술이 발달하리라. 그때가 되면 좀 유용하게 쓰지 않을까?


(2015.02.11.)



-후기


역시 필통따위 아무짝에도 쓸모 없지 않아? 라는 생각이 들어 기본 장비로부터 필통을 퇴출시킨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렇게 하고 보니, 정말 필통 따위 전혀 쓸 일이 없더군요. 필통은 오히려 '전자담배 쌈지'라는 이상한 용도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이와 펜을 쓰는 용도도 불경스럽게도 전자담배 액상을 제조할 때, 니코틴의 농도 따위를 계산하는 데 가장 많이 쓰고 있습니다. 머리가 나빠선지 이런 수학적 계산은 종이에 펜으로 끄적이면서 해야 가장 집중이 잘 된단 말이죠. 


그런데 이런 종이와 펜의 효과는 최근에 연구로도 증명이 된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는 작문을 할 때 두 손이 아니라 한 손으로 타이핑 했을 경우 더 좋은 문장을 썼다는 연구 결과였는데, 생각을 아웃풋 하는 시간이 작문에 영향을 준다는 뜻이니 종이와 펜으로 하면 아마 더 잘 되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얼씨구나 종이와 펜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것이... 역시 이런 고전적 아날로그는 효율이 지독하게 떨어진단 말이죠. 저는 매일 쓰는 일기만 해도 작업시간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뇌파로 타이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라 다시 펜을 드는 것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감성과 효율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기술이 언젠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때까지는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려야죠. 


(201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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