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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Oct 31. 2018

반려 아이패드와 함께 늙어가기

예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나는 태블릿 기기를 무척 좋아한다. 아니, 좋아하고 말고 이전에 태블릿이 없는 생활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대체 태블릿 없이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모르겠다. 가령 식탁에서 보이는 자리에 TV가 없으면 무엇으로 영상을 틀지? 스마트폰? 하기야 요즘은 스마트폰 화면이 7인치를 넘보고 있으니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기왕 영상을 볼 거라면 큰 화면으로 보고 싶다. 그리고 영상을 틀어놓고 밥을 먹으면서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집적대는, 상당히 복잡한 나태함을 즐기고 싶기도 하다. 


아무튼 어젯밤엔 우리 아빠가… 아니 애플이 또 새로운 아이패드를 들고 나왔다. 이번에도 ios 기기의 상징 같던 홈 버튼을 없애버리고 화면을 넓히고 페이스 아이디를 집어넣고 기막힌 스피커와 신형 펜슬 자석 부착 무선 충전 등등을 넣은 다음 호된 가격으로 백성을 도탄에 빠트렸는데, 나야 지금 에어2를 잘 쓰고 있고 딱히 애플 펜슬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아니라 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패드와 나 사이에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패드 에어2는 정말 아무 문제도 불만도 없이 잘 쓰고 있지만, 아버지가 쓰고 있는 아이패드2가 말썽이다. 


아이패드2! 아이패드의 충격적인 등장 이후, 모든 것을 더 낫게 정비하여 나온, 그야말로 최근에 각광받기 시작한 밴드의 2집 같은 명기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독보적이고 완벽했다는 뜻이다. 나는 대학 시절 말기를 아이패드2와 함께 동고동락했고, 내 주변으로도 아이패드2라는 하이칼라 유행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만큼 학생에게 유용하고 만능적인(실제로 그랬다고 보긴 어렵지만) 도구였던 셈이다. 


아이패드 2는 발표 준비, 필기, 영상 감상, 게임 모든 것을 처리 가능한 최고의 머신이었다. 그 시절에는.


그리고 애플은 언제까지고 고향 땅을 잊지 않는 타지의 효자처럼 옛날 기기 챙기기를 부지런히 하는 편이라 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패드 2는 제법 쓸만한 물건이었다. 2011년에 나온 기기니까 스마트 기기로서는 엄청나게 오래도록 현역으로 뛴 셈이다. 그런데 ios 버전이 올라가면서 어쩐지 차츰 느려져, 이제는 뭘해도 노병을 혹사시키는 기분이 들게 되었다. 


아니, 물리적인 모터가 돌아가는 하드를 쓰는 것도 아니고, 온갖 앱을 닥치는 대로 깔고 동시 실행해서 램을 갉아먹는 것도 아닌데 왜 웹서핑 하나조차 힘들어졌단 말인가? 이것은 합리적인 의심을 하기 충분한 대목이다. 애플은 이미 배터리가 노후된 기기를 지키기 위해서 소비자 몰래 성능을 떨어뜨리는 짓을 해서 고소당한 전적이 있으니(나도 그 소송에 끼었다) 아이패드 2라고 가만 놔뒀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해서 이리저리 검색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보다 훨씬 기기에 해박한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분석했을 테니 그렇다면 그런 것이리라. 아이패드 2가 느려진 이유는 ios 버전과 앱들의 버전이 올라가면서 그에 적합한 퍼포먼스를 낼 수 없게 된 탓이라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좀 이상한 이야기로 들린다. 퍼포먼스가 낮아질 것을 제조사인 애플이 모를 턱이 없으니 ‘버전을 올리면 느려질 수 있다’ 하고 제대로 고지를 해주든지, 아니면 올렸다가 다시 내릴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2년이나 차이가 나긴 하지만, 넥서스 7 2세대는 ‘오레오’가 나온 지금 ‘마시멜로’를 쓰면서도 엊그제 샀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쌩쌩히 아무 문제 없이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는데, ios 9를 쓴다고 그렇게 힘차고 멋지던 기기가 오늘내일 하는 기기처럼 느려진다는 것은 상당히 어불성설로 느껴진다. 이와 관련해서도 어디선가 소송이 진행중이라고 들었는데, 부디 애플이 뜨거운 맛을 쬐끔만 보기를 바란다. 


아무튼 제때 처분하지 못한 아이패드 2를 이제와서 처분하자면 단돈 10만원에 팔아야 하는데, 이리저리 검색해 봐도 10만원 언저리에 잘 돌아갈 것 같은 10인치급 기기라는 것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돈을 더해서 다른 기기로 바꿔 버리자니 일체의 소비 행위를 경멸하는 아버지가 아이고 잘했다 칭찬할 턱도 없는지라 아이패드 2를 소생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다시 검색해보니 아이패드 2의 ios 펌웨어 6.1.3이 공식적으로 설치 가능한 상태였다. 애플은 시간이 지나면 예전 펌웨어를 설치할 수 없게 아예 막아버리는데, 어째서 이 과거의 펌웨어가 여태 살아있는지는 도통 모를 일이다(https://ipsw.me/#!/version). 하지만 좋은 일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자, 과거의 아름다운 나날로 돌아가자! 나는 이리저리 대단히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아이패드 2를 DFW모드로 진입시키고 펌웨어 설치에 성공했다. 부팅해 보니, 모든 것이 실체를 갖고 있던 스큐어모피즘의 UI가 나를 반겼다. 깔끔하고 예쁘지만 납작하고 뭐가 뭔지 모를 몬드리안 작품을 한참 보다가 모든 게 손에 잡힐 듯 확실한 르네상스 시대 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아이패드는 영약을 먹고 젊어진 사람처럼 빠릿빠릿해졌다(단순히 갈아엎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사람도 이렇게 깔끔하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아무튼 이 상태에서 과거 구매 목록으로 들어가 앱을 다시 설치하면 이 버전의 ios에 적용 가능한 버전의 앱을 다시 설치할 수가 있대서 그렇게 했다. 정말로 ios 6 시절에 썼던 것만 그때처럼 쓸 수 있는 셈이니, 과거로 돌아간다는 게 허튼 비유만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과거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고, 아이패드는 다시 정정해졌다…… 라고 쓸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결과는 그렇지가 않았다. 지금 아이패드2는 거의 티빙 머신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하필이면 티빙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앱은 정상적으로 설치 되어 있는데, 아무리 실행해도 튕겨버렸다. 아마 애플이 제시한 기준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만든 것이리라. 


환장할 노릇이지만 아무리 기기가 빠릿해졌대도 주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면 이건 도통 의미가 없다. 결국은 이를 갈면서 ios 9로 다시 업데이트하고, 이리저리 검색해서 최적화를 수행했다. 최적화라는 게 별 것은 아니고, 간편하고 멋지지만 메모리에 부담을 줄 수 있는 기능들을 모조리 비활성화 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효과도 끄고 스포트라이트 검색도 끄고 백그라운드 갱신도 끄고 자동 업데이트도 끄고….. 아무튼 관련 정보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고, 결과도 썩 나쁘지 않았다. 아이패드2는 동영상 재생기로서 다시 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화면 크고 필요한 일은 멀쩡히 수행하고 있으니 당분간 굳이 처분할 필요는 없으리라.  

(네트워크 설정 재설정만 해도 꽤 빨라진다고도 하니 필요한 분은 갈아엎기 전에 시험해보시길) 


하지만 이렇게 부산을 떨며 시도한 반로환동에 실패하고 나니, 아이패드 2의 앞날이 진지하게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와서 팔아버리기도 뭣한 상태로 무덤까지 같이 가자고 계속 쓰다 보면 결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답은 티빙이 보여줬다. 아무리 기적같은 방법을 써서 펌웨어를 과거로 되돌린다 하더라도 주로 사용하는 앱이 그 상태를 지원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티빙만이 걸렸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나마 예전에 썼던 앱 중에서도 하나씩 쓸 수 없는 앱이 늘어날 것이고, 마침내는 기본으로 깔려있는 몇 안되는 앱, 그리고 웹서핑만 간신히 될까말까한 상태가 되지 않을까.  


새로운 것은 할 수 없게 되고 그동안 하던 일들도 차츰 할 수 없게 되어가는 이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인간의 노화와 비슷해서 상상하는 것만으로 여간 씁쓸하지 않다. 당장 나만 해도 새 기술은 그나마 받아들이는 편이지만 새 단어는 싫어하고 쓰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동시에 원래 쓰던 단어들도 종종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 노화가 진행되면 고유명사부터 까먹게 된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런 모양이다. 요는 아이패드 2가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지점을 지나버렸고,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지점의 언저리에 있다는 것이다. 새 것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어졌는데 그렇다고 예전에 하던 것을 더 잘하게 되었느냐면 그것도 아닌….... 문제는 기계인 아이패드야 그때그때 윈터솔저처럼 리셋해서 자체적인 기능을 현상유지에 가깝게 잡아둘 수 있는 반면, 인간인 나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니까 어떤 부분은 포기하고 어떤 부분은 더 나아져야 하는데, 그런 부분들을 잘 구별하면서 늙어가고 있는지 자신이 없다. ‘나는 이 부분이 확실히 나아졌다!’ 하고 호언장담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으리라는 것만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고작 아이패드2 재설정해놓고 별 생각을 다하는군. 아무튼 아이패드 2는 앞으로도 우리집에서 늙어가며 시대에 뒤쳐질 예정인데, 할 수 없는 일이 하나씩 늘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든 붙잡아둬야 한다고 생각하면 영 막막하고 기분이 좋지 않다. 어쩌면 어느날 갑자기 켜지지 않게 되는 게 서로에게 편한 길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아이패드가 생물은 아니니까 이게 그렇게 이기적인 생각은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부디 이 낡은 기기가 앞으로도 안정적으로 활약할 수 있는 방법이 발견되길 바란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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