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Feb 17. 2016

늙은이로서의 인사와 화제의 빈곤함


오랜만에 어른을 만나면 항상 무슨 관등성명을 대듯이 학교, 전공, 학년, 이성교제 유무 따위를 묻는 질문에 대답하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해왔고, 그건 명절만 되면 모든 젊은이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고통이기도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어째서 그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가 점점 이해하게 되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의 장점이라면 장점이겠다. 물론 어른들 입장에서 나 따위는 새파란 꼬맹이로 보일 거고 나 역시 자신을 그렇게 느끼는데, 이것도 학교에 가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한참 후배라고 생각했던 친구들도 이제 신입생에게는 어마어마한 대선배가 되어 있다. 그 친구들이 보는 나도 구름 위의 학번에 가까우니, 신입생이 보기에 나는 바다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고대신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자의와 무관하게 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애어른이 되어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을만큼 나이 어린 후배들을 만나면 인사를 하긴 하는데, 이건 아주 이상한 관계가 된다. 인사를 안 할 수도 없는 건 당연하고, 인사만 하고 대화를 끝내버리자니 너무 박정한 인간이 되는 것 같다. 때문에 이름도 제대로 기억할까 말까면서, 혹은 이름을 외울 의지도 별로 없으면서 억지로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에 대해 자랑할 것도 없고, 나의 신상을 묻게 만들고 싶지도 않으니 먼저 말을 꺼낼 수밖에 없는데, 그리하여 꺼내는 말이라고는 기껏해야 이름, 과, 학년을 다시 묻는 것 뿐이다. 


“오늘 날씨가 참 좋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은 무슨 색이야?"
“혈액형이 뭐야?"
“피망 좋아해?"


이런 질문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렇게 기껏 한 질문도 딱히 마음에 없던 것이라 그 자리에서 돌아서는 순간 대답이 뭐였는지 머릿속에서 날아가고 만다. 특히 나이나 학년은 해마다 바뀌기 마련이라 제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기억할 재간이 없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이럴 땐 무슨 띠였는지 입력해두면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덕분에 띠가 있는 국가에서는 노인들의 연령 조사가 꽤 정확하게 이루어진다는 얘기도 있다. 십이간지 시스템은 그야말로 동양의 신비다. 


학년과 과, 나이 따위 질문을 받았을 때 신입생의 기분이 이런 표정이리라는 것은 경험상 알수 있다.


각설하고, 이렇게 별로 친하지 않은데다 시간 문제로 그렇게 친해질 의도도 가질 수 없는 사람 둘이 모였는데 대화는 해야 하는 때 겪는 화제의 빈곤함이란 재난이 따로 없다. 서양인들은 그럴 때도 곧잘 아무 얘기나 하는 것 같지만, 동양인인데다 소심한 나로서는 난감할 따름이다. 그럴 때 나누는 말이 상식이나 규범으로 보급되어 아무도 곤란을 겪거나 의문을 품지 않으면 좋겠다. 가령 이런 식으로.


1.서로의 이름을 묻고 답할 것, 이때 이름을 말한 뒤 성을 붙여서 다시 말한다.

“안녕하세요. 철수, 김철수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영수, 김영수입니다."


2.요즘 무얼 하느냐는 질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실례가 되므로 절대 하지 않는다. 


3.날씨에 대해 말한다. 

“요즘 황사가 정말 심하더라구요."
“그러게요, 어제는 목이 컬컬해서 죽는 줄 알았지 뭡니까."


4.가장 최근에 본 영화에 대해 말한다. 

“어제 킹스슬레이브를 봤는데, 아주 재미있더군요."
“그래요? 아직 안 봤는데 꼭 봐야겠군요."


대화를 정해진 절차에 따라 한다는 건 우스꽝스럽고 감정이 사라진 디스토피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의 예의범절 중에는 이것보다 훨씬 불합리한 이유로 만들어진 것들도 있으니까 이쯤은 괜찮지 않을까? 


이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도 있다. ‘화제’ 앱을 만들어서 그 안에 언제 얘기해도 될만한 키워드 카드들을 넣어두는 것이다. 이 기본 키워드 카드 세트는 무작위로 구성되어 각 사용자가 다른 화제를 갖게 되며, 필요하면 추가로 화제를 구입해 자신만의 화제 덱을 구성할 수 있다. 그리고 각 화제는 개별적으로 다른 희귀도를 갖고 있어 트레이드와 수집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것만 있으면 이야기 걱정은 안녕, 당신도 입담의 제왕!


써놓고 보니 재미는 있는데, 과학의 발전으로 너도나도 이런 커뮤니케이션 보조 프로그램을 쓰게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참 큰일이다. 운전을 하면서 내비게이션 없이는 마트도 가지 못하게 된 것처럼, 보조 프로그램 없이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이 속출할 것이다. 그때쯤 되면 어른들은 ‘요즘 젊은 놈들은 프로그램 없이는 말도 못하는군. 나때는…’ 하고 개탄하리라. 하지만 그런 개탄도 나름대로 일리는 있어 보인다. 소통 능력이 점점 퇴화하는 것은 길든 짧든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나저나 간혹 그리 친하지 않거나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 이야깃 거리가 영 없다 싶으면 나는 신세 한탄이나 정부 욕을 하는 대신 상대가 좋아하는 것에 파고드는 방법을 쓰고 있다. 게임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애니메이션이든 최근 접한 콘텐츠로 시작해서 점점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둘 쏟아지기 마련이다. 싫어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도 욕하는 재미는 있지만, 기왕이면 긍정적인 얘기를 하는 쪽이 좋은 정보도 얻을 수 있고 뒷맛도 개운하다. 뭐, 이런 방법도 명절에 만난 친척 동생에게 적용할 수는 없으니, 결국 나는 싫어할 걸 알면서도 학년 따위를 물을 게 뻔하지만. 


(2015.02.25.)



-후기

명절의 친척 동생 하니까 생각난 건데, 이번 설에도 친척 동생과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나이 차가 심한데다가 각자 바쁘고, 어른이 없이 별개의 공간에서 대화할만한 시간이 생길 수가 없다보니 그렇게 되는군요. 결국 소 닭보듯 하는 관계가 되었는데, 조상을 기리기 위해 산 자들이 억지로 모여 신통치 않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앞뒤가 바뀐 게 아닐지? 뭐, 서로 상처주는 얘기를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만.


그건 그렇고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도 어떤 공통의 상황 같은 게 있으면 훨씬 간단해지는 법이더군요. 최근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똑같이 외지에 나온 처지라 그런지 생판 처음 보는 한국인들끼리 쉽게 말을 걸고 조언을 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타인과의 대화를 이어가는 묘수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것인가 봅니다. 


(2016.02.17.)


매거진의 이전글 하드보일드 치과 익스프레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