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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Feb 19. 2016

그레이와 50가지 체벌


요즘 에로티시즘을 노골적으로 다룬 소설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영화화되면서 원작에 대한 관심은 물론이고 성인용품 판매량까지 급증했다는 얘기가 들리는데, 역시 영화의 힘은 무섭구나 싶다. 하지만 너도나도 인터넷에서 안대나 채찍, 결박 도구를 산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3류적인 디스토피아의 한 장면 같아 오싹하다. 


아무튼, 아무리 사회 현상의 중심에 있고 고급스럽게 포장해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에로 영화라는 데는 변함이 없는데, 그러한 에로 영화가 대중문화의 중심점에 가까운 극장에 대대적으로 걸렸다면 이건 한번 봐둘 가치가 있지 않은가 싶어 나는 개봉 전부터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개봉하자마자 들리는 소식은 ‘돈과 인생을 소중히 하라’는 것들이라 어쩔 수 없이 관람을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아무리 망작을 즐겨보는 사람이라지만 재미없는 에로 영화를 극장까지 쫓아가서 볼 정도로 열성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별수 없이 도서관에서 원작을 빌려 보았다. 운 없게도 예약한 1권과 2권 중 2권이 먼저 도착해서 2권만 읽었는데, 도입부야 대강 여기저기서 주워들었으므로 보는 데 별 지장은 없었다. 적어도 전반부에 복선이 깔려 있어서 뒤를 읽다가 옳거니, 하고 앞을 뒤적여볼 만한 소설은 아니었던 것이다. 


내용을 아주 간략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주인공 아나스타샤 스틸이 젊고 그리스 신처럼 잘생긴 억만장자 크리스천 그레이를 인터뷰하러 갔다가 어떻게 눈이 맞는다(전반부라 확실치 않다). 그런데 그레이에게는 이런 계통의 작품에 나오는 남주인공들이 흔히 그렇듯이 마음의 어둠을 갖고 있고, 그것은 BDSM이라는 성적 취향으로 드러나, 아나스타샤는 그레이의 서브미시브가 되느냐 마느냐로 고민하면서 시도때도없이 섹스한다. 


사실 여주인공이 정말 보잘것없는 여성이라는 점도, 그리고 남주인공이 기막힌 미남에 억만장자라는 점도 그야말로 판에 박힌 이야기였다. 남주인공은 ‘무슨 마법을 부렸지? 난 완전히 너에게 사로잡혔어.’ 같은 말을 뇌까리고 맥북이나 블랙베리 따위 갖가지 선물을 하며, 여주인공은 그런 그를 사랑하기에 그의 마음 깊은 곳 어둠까지 보고 싶어하는 한편 자신이 그의 진정한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울며, 그러면 남주인공이 전용기나 헬리콥터를 타고 대륙을 가로질러 짠 하고 나타나 달래주고 함께 잠들었다가 늦잠에서 깨어나 ‘제길, 지각이군. 이런 적이 없는데.’ 라고 중얼거리는 것이다. 


여기까지야 정말 뻔하디뻔한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단연코 남주인공의 남다른 성적 취향이었다. 묶고, 규칙대로, 때리고, 맞는다. 예전이라면 그냥 기분 나쁜 변태성욕으로 다루어질 ‘플레이’가 어쩐지 깊은 사연을 가진 행위가 되어 아나스타샤는 주저하면서도 점점 여기에 익숙해지고 마는 것이다. 


작가 E.L. 제임스 자신도 이 부분이 자신의 소설에서 가장 멋진 부분이라고 생각했는지 2권에서는 몇 페이지 건너서 한 번씩 섹스씬이 나오는데, 여성의 시점에서 쓰여진 탓인지, 아니면 내게 익숙한 일본 문화와는 동떨어진 영역에서 쓰인 탓인지 이런 장면들은 아주 정성스럽게 묘사되어 있으면서도 아주 깔끔해서 에로물 특유의 ‘질척거림’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TV 광고에 등장하는 모델하우스처럼 말끔하고 이상적인 섹스였다. 도통 야하지 않다는 평을 여기저기서 들었는데, 적어도 나는 동의할 수 있었다. ‘그의 일어선 부분이 닿았다.’, ‘그가 나를 가득 채웠다.’, ‘나는 오르가즘의 소용돌이로 떨어져 내렸고, 그는 곧 섹시한 신음을 흘리며 자신을 방출했다.’ 같은 묘사에 마른침을 삼키며 흥분하기에 내 마음속의 어둠은 너무나 깊은 것이다!


무려 여섯 권이나 되니까 뒤로 가면 얼마나 굉장한 플레이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BDSM의 수위도 어째 그렇게 굉장하고 변태적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벌’이랍시고 아나스타샤가 엉덩이를 몇 대 맞기도 하고 별로 아프지 않은 채찍으로 맞기도 하는데, 그러면서 평생 처음 맞은 것이었다느니, 너무나 충격이었다느니 푸념을 하는 게 영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성적인 의미는 없을지라도 나는 그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체벌을 보고 듣고 겪어온 것이다. 


온갖 성적 판타지로 포장되더라도  맞는 건 어쨌든 싫은 일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과거의 선생님들 중에는 이상할 정도로 독특한 체벌 방식을 개발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래서 야구배트나 방금 막 부러뜨린 대걸레 자루로 엉덩이를 때리는 것은 당연한 영역이고, 맞을 때마다 자기 이름을 외치게 하기, 칠판 앞에 세운 뒤에 벨트를 풀어 등을 채찍질하기, 동전으로 머리를 때리기, 손가락 사이에 펜을 끼우고 손가락을 힘껏 조이기, 창틀에 널어놓기, 웃통을 벗기고 팔굽혀펴기를 시키며 등에 물을 뿌리기, 양팔을 벌리고 손끝으로 작은 원을 그리게 하기, 두 손을 모아 장작 패는 시늉을 시키기,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박되 바닥의 격자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기, 문틀에서 엎드려 뻗치게 하기, 야구 배트로 가랑이를 올려치기, 집게로 입이나 가슴을 집어놓기, 체육 시간에 체육복과 속옷이 아닌 옷은 모두 벗고 수업을 듣게 하기… 등등 오랜 전통부터 순간의 기지까지 별의별 체벌이 존재했던 것이다. 작중에서 그레이는 ‘고통의 방’에서 본격적인 플레이를 즐기는데, 그것처럼 방송실로 불러다 남들 몰래 손발을 써서 체벌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고 지금이고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긴 하지만, 돌이켜보면 혹독한 환경이었다. 서양권 작품에선 어릴 때 이런 일을 겪으면 당연한 수순으로 연쇄살인마나 이상 성욕자가 되기 마련인데, 내가 아는 한도 안에선 동창들 모두 꿋꿋하게 올바른 성인이 되었다. 나 역시 주기적인 살인 충동을 느끼거나 크리스천 그레이 같은 취미를 갖게 되지는 않았다. 천만다행이다. 취미와 취향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그레이 같은 취미 생활을 영위하려면 비용이 이만저만 많이 드는 게 아닐 것이다. 취미도 형편에 따라 골라야 하지 않겠는가?


각설하고, 어떻게 포장되었든 에로물이 주류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건 꽤 재미난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크리스천 그레이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흐름이 계속된다면 조만간 블랙이든 화이트든 더 대단한 녀석이 나타나지 않을까?


(2015.03.04.)



-후기

OST만 살아남은 희대의 망작으로 명성을 떨친 터라 이 글을 쓴지 1년이 지나는 지금까지도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책도 1권을 찾아보진 않았습니다. 안 그래도 읽을 책이 쌓여 있는데 굳이 재미없는 책을 참고 읽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재미없다는 건 어디까지나 저 개인의 취향과 의견일 뿐으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의 판매 부수는 놀랍게도 해리포터 시리즈의 판매 부수를 넘겼다고 하죠.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1억부 넘게 팔린 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비슷하게 SM을 다룬 "나나와 카오루" 시리즈나 웹툰 "모럴센스"는 초대박을 터뜨리지 못했는가, 생각해봅니다만 명확한 이유는 (당연히) 저도 모릅니다. 짐작해보건대 이상적 판타지로서 받아들여졌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그나저나 미스터 그레이가 시도한 것들이 한국식 체벌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참을 수 없으면 말해"라고 달콤하게 속삭이면서 붕대를 두른 대걸레 자루로...음, 제아무리 그리스 신처럼 멋진 그레이 씨라도 그 상황을 로맨틱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건 판타지가 아니라 악몽일 뿐이죠. 


(2016.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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