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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r 27. 2019

게임만이라도 느긋하게 즐기고 싶다

요즘의 고민거리 중 하나는 게임 하기가 영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여럿이 모여서 하는 보드게임은 물론이고 혼자서 하는 전자오락도 그렇다. 근본적인 돈과 시간 문제를 떠나서 생각해도 선뜻 게임을 시작해서 오래 붙들고 있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학생 때는 분명 재미있는 게임이 있으면 지치지도 않고 몇 시간 내내 붙들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헤비하게 게임을 즐기는 데에도 적정한 나이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만 보니 최근에 들어서 내 게임 취향과 습관이 요즘 히트작들과 잘 맞지 않게 된 탓도 크다. 나는 어떤 게임을 하든 좀처럼 공략을 보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어째 요즘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게임들을 해보면 도저히 공략을 보지 않고는 진행할 길이 없는 것들이 많다. 가볍게 즐기면 될 것 같았던 소셜 게임들도 카드를 적절하게 키우고 모으고 합성해서 덱을 구성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반복 노동을 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콘솔 게임도 신나는 액션을 즐기면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캐릭터를 키우면 될 줄 알고 시작했더니 온갖 재료를 긁어모아 장비를 맞추고 업그레이드하고 약점을 치밀하게 공략하거나 유료 서비스로 동료를 불러와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옛날에 ‘포가튼 사가’를 할 때는 직접 지도를 그려가며 던전을 돌았고, ‘아마가미’라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할 때는 상대가 무슨 얘기를 좋아하는지 하나씩 화제를 던져보고 일일이 기록하는 것 정도로 기분 좋게 해결할 수 있었는데, 요즘 게임은 그런 식으로 탐구하기엔 연구 분량이 너무 많다. 


게임 연구도 멋진 일이긴 하지만 한동안은 그럴 에너지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이야기를 다루려는 사람으로서 히트작을 보고 뭐든 배워보자는 생각도 있고, 일단 산 게임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기도 해서 그렇게 내 취향과 핀트가 맞지 않는 게임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긴 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게임을 하다보면 어째 쉬면서 느긋하게 즐기는 기분이 아니라 상당히 험한 노동에 시달리는 기분이 들곤 한다. 대강 이런 식이다.  


내가 스토리를 따라서 골드 드래곤을 잡고 싶다고 치자. 그런데 이것을 잡으려면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싸우든지, 아니면 레벨을 키워 오든지, 아니면 완벽한 장비를 맞춰 와야 하는 것이다. 나는 실수하지 않을 자신도 없고(이미 수십 번 패배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몬스터를 잡고 또 잡는 것도 내키지 않으니 장비를 맞추려고 결심한다. 그런데 충분한 장비를 맞추려면 드레이크를 백 마리쯤 잡아서 드레이크의 등뼈 열개를 모아야 하고, 드레이크를 쉽게 잡으려면 다른 동네에 가서 드레이크 사냥용 장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게임을 엄청나게 잘하게 되든지, 아니면 이래저래 반복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물론 요즘은 돈을 써서 당장 강해지는 방법을 제공하는 게임도 많다. 모바일 게임은 애초에 그게 수익 구조이기도 하고. 하지만 돈이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사고방식이 구닥다리라 그런지 돈을 써서 게임 내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영 들지 않는다. 직소 퍼즐을 맞추다가 어려워서 옆집 천재에게 용돈을 쥐어주고 대신 맞춰달라고 부탁하는 기분이다. 그러면 당장 답답한 것이야 해결되겠지만 게임의 본질적인 부분을 망가트리는 게 아닐까? 다시 말해 게임은 한정된 자원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즐기는 것일 텐데, 이것을 훌쩍 건너뛰는 것도 모자라서 돈까지 더 쓴다는 건 기존 게임의 논리로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일이다. 요는 요즘 게임들이 재미있는 부분 사이에 엄청나게 귀찮거나 고역스러운 부분을 끼워넣어 분량이나 수익면에서 이익을 취하는 방법을 택했거나 게임의 초점 자체를 수집과 소유로 옮겼다는 뜻인데, 별로 반갑지 않은 시류다.  


아무튼 요즘 게임을 하고 있으면 이래저래 괴로워질 때가 많다. 특히 뭔가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물건을 만들 재료를 구하기 위해 그 재료를 떨어뜨릴 수도 있고 떨어뜨리지 않을 수도 있는 몬스터를 닥치는 대로 찾아서 죽여야 하는 경우에는 현실에서도 모자라서 게임에서까지 장시간 노동과 불확실한 보상에 시달려야 한다는 사실에 영혼이 달아날 것 같다. 옛날에 코룸 3라는 게임에서 100층짜리 던전을 다 내려가면 전설의 검이 나온다는 말에 정말 100층을 내려가서 그것을 찾아 나오는(심지어 100층을 성실하게 걸어나와야 한다) 짓까진 해봤지만, 희귀 아이템을 떨굴 수도 있는 몬스터를 수십 번도 더 죽이는 짓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기왕이면 노동을 해도 뭘 몇 번 하면 되는지 깔끔한 수치가 나오는 노동을 하고 싶다. 게임 안에서만이라도 착취는 피하고 싶다. 


노동 문제뿐만 아니라 게임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도 나로서는 난처한 일이다. 그냥 패턴이 까다롭고 강대해서 깨기 어려운 보스 몬스터 따위가 나오는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게임의 기본 골자부터 공략을 봐야만 하는 경우에는 정말이지 의욕이 싹 달아나 버린다. 예를 들어 캐릭터의 능력에 관한 부분이 아주 독창적이라 무슨 재료를 구해서 뭘 합성하고 강화해서 어디에 보석 같은 걸 박으면 그 옆자리와 연계가 되어 보너스가 발생한다든가 하는 시스템이면 설명을 읽고도 알아듣지 못해서 대충 넘겨버리고 아무렇게나 대충 찍어버리게 된다. 물론 공략을 찾아서 잘 읽고 이해하면 내가 해야 할 일과 캐릭터를 육성하거나 아이템을 만들어낼 방향이 다 나오겠지만, 심신의 안정을 얻고자 하는 게임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노력하고 싶지 않다. 열정적인 게이머가 본다면 ‘그따위 어중간한 각오로 게임을 하려 하다니! 게이머의 수치야!’ 라고 느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종종 숨쉴 에너지도 모자라서 빌리고 싶어질 지경이기에 도저히 그런 각오는 못하겠다. 게임만은 되도록 멍청하고 느긋하게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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