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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Apr 18. 2019

읽지 않은 책이 빚이라면 난 이미 망했어

그러나 읽고 싶은 책을 사서 읽는다는 프로세스는 확실히 숨쉬는 것처럼 당연한 면이 있어서 도무지 그만두기가 쉽지 않다. 썩 훌륭한 생활용품, 가령 충전 케이블 같은 게 아주 저렴하게 나온 것을 봤을 때는 잔고를 보고 ‘음, 사봤자 어차피 금방 고장날 걸’ 하고 못 본 척 지나갈 수 있고, 영화까지도 ‘안 보면 뭐 어때. 곧 스트리밍으로 나오겠지.’ 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책만큼은 그렇게 참고 지나가기가 쉽지 않다. 일단 책은 명백히 제각각 다른 물건이라 ‘집에 책이 몇 권인데 또 산다는 거야!’ 하고 스스로 꾸짖을 수도 없고, 관심이 가는 책을 그렇게 넘기면 상당히 심각한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든다. 이런 식으로 지나쳤다가 대단히 긴요한 정보나 지혜, 혹은 빼어난 즐거움을 놓치고 넘어가는 게 아닐까? 따위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요즘은 크라우드 펀딩 같은 방식으로 책이 한정 생산되거나 정식 출간 전에 사는 사람에게만 싸게 살 기회가 주어지는 등의 이벤트가 적지 않아서 아차하는 순간 돈이 나가고 만다. 그렇게 산 책 중에 정말 잘 읽은 게 얼마나 있었는가 하면 할 말이 별로 없긴 하지만(책의 내용을 떠나서 일단 읽질 못한다), 그래도 솔깃한 것이 보이면 퍽 괴로워하면서도 사지 않을 수가 없다. 영화나 게임 속 모험가가 진위도 알 수 없는 낡은 보물 지도를 사는 것과 비슷한 심리다. 어쩌면 엄청난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막연한 희망을 사는 셈이다.


그렇게 보면 책장에 그득히 쌓인 ‘안 읽은 책들’을 빚이 아니라 희망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까? 만사 그렇듯이 생각하기 나름일지도 모른다. 그 저명한 움베르토 에코조차 도서관 못지 않을 정도로 모은 책의 반도 채 읽지 못했다고 하니 내가 감히 쌓아놓은 책이 많다며 불평하는 것도 웃기다 싶기도 하고.


하지만 모자란 책장 문제는 책을 희망으로 본들 절망으로 본들 당연하게도 해결될 턱이 없다. 책장에 책 꽂을 자리가 없어 책을 다른 책 위에 놓기 시작하면 경고등이 켜진 것이나 다름없는데, 내 방의 책장엔 책이 가로로 꽂힌 것도 모자라서 이중으로 꽂힌 곳도 있다. 그런 와중에 안 살 수 없는 전집류를 몇 질 샀더니 책을 바닥에 쌓아놓아야 하나 싶은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생활 환경이 말끔하고 아름답게 유지될 턱이 없다. 결국 나는 눈물을 머금고 책들을 닥치는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읽으라고 주워왔지만 아마도 읽을 수 없을 책 몇 권부터 시작해서 정말 재미있었지만 아마도 다시 읽기 힘들 소설 전집이 우선 정리 대상이 되었고, 소설을 쓸 때 참고하려 한 자료집도 없애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고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도서관이 둘이나 있고, 어떤 책을 당장 펼쳐서 읽어봐야 하는 경우란 거의 존재하지 않으니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처분할 자료 중에서 독립출판물이라 다시 구할 길이 없는 것들은 스마트폰 앱으로 스캔해서 정보만은 남길 수 있었다.


그런저런 각고의 노력 끝에 무너질 듯했던 나의 책장과 절찬리에 비참해질 예정이었던 나의 생활 공간은 간신히 추악하지 않은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책만 늘어나는 게 아니라 신발도 늘어나고 있으므로 숙청 작업도 주기적으로 지속하고 있다. 고칼로리 음식을 많이 먹어대면 운동도 늘릴 수밖에 없듯이, 새 물건을 들이면 헌 물건 중 어떤 것은 내보낼 수밖에 없으니 자연스러운 이치로 받아들일 일이다. 책 속에 새로운 길이나 희망이 있기야 하겠으나 모든 길을 택할 수도 없고 모든 희망을 품을 수도 없다. 말끔한 삶을 추구하기 이전에 포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책장을 볼 때마다 배우고 있다.

‘어바웃 타임’이라는 멋진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식사를 하며 서로의 직업 얘기를 할 때 여주인공이 출판사에서 원고를 읽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하자 남주인공이 “와, 그거 숨쉬면서 돈을 받는 것 같은 거네요!”라고 놀라워하는 것이다.


아마 영화 속의 남주인공도 독서를 좋아해서 한 말이었을 테고 퍽 재치있기도 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실제로 어디 가서 간단히 내뱉을 만한 말은 아닌 것 같다. 일단 좀 쓸데없이 교양을 과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음악은 클래식을 제일 좋아합니다’ 같은 말에서 느낄 수 있는, ‘악의 없는 젠체’ 같은 것이 미세하게 포함되어 있다고 할까.


게다가 사실 독서가 숨쉬듯 자연스러운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책을 읽는다는 건 대체로 어느 정도 이상의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이고, 사람이 가진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며, 사람들 대다수는 먹고 사는 일에 과도한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기에 독서를 그렇게 마음 편히 ‘숨쉬듯’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숨쉬는 것 같은 일이라면 아마 유튜브 시청이 더 맞지 않을까?


나도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도합 세 시간쯤 되는 이동 시간에 당연하다는 듯이 책을 읽었고, 덕분에 독서량도 제법 되었다. 하지만 학교에 가지 않게 되자 그런 시간은 영영 잃어버렸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판교 부근까지 출퇴근하던 시절이 있긴 했지만, 그때는 끔찍한 출퇴근 인파 때문에 종이책을 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전자책에는 별로 정을 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일기나 쓰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게다가 그 뒤로는 프리랜서라고 주장하는 한량이 되어 지하철을 타고 정기적으로 장시간 이동을 하는 일이 없게 되었으니, 반강제적인 정기적 독서 시간은 상실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책 읽는 시간이 엄청나게 줄어든데 비해 새로운 책을 접하는 채널은 늘어났다는 점이다. 일단 온라인 서점에 알림을 등록해 둔 작가나 출판사가 새 책을 내면 자동으로 메일이 날아온다. 게다가 작가나 출판사가 운영하는 트위터로도 신간 얘기를 듣게 되며,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서도 이번에 기막힌 책이 모금중이라고 소식을 전한다. 할인 이벤트가 있다고 앱으로 알림이 뜨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온라인 서점인 알라딘에서 제공하는 신간 정보는 물론이고 인근 서점의 입고 알림도 훑어보고 있다. 게다가 작업에 도움이 될 참고자료까지 열심히 찾아대니 그야말로 매일이 신간의 홍수에 휩쓸리는 나날이다.


견물생심이라고 이런 정보를 자주 접하다 보니 소비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연히 책을 예전보다 많이 사게 되었고, 덕분에 책의 공급량이 소비량을 압도적으로 추월하고 말았다. 이런 말을 들으면 서점과 출판사야 우수 고객이라고 좋아할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꼭 반가워할 수만도 없는 상황이다. ‘저 책 읽어야 하는데…….’ 하는 정신적 부채감에 시달리는 건 어떻게 봐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쌓아놓기만 한 책이 빚이라면 나는 완전히 파산한 상태다. 게다가 누가 독촉할 때마다 돈을 조금씩 갚듯이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대여섯 권의 책을 같은 기간동안 한꺼번에 읽다 보면 일을 벌릴 줄만 알고 수습은 못하는 인간이 된 것 같아 기묘한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죽을 땐 책이라고 외쳐라, 책이 널 죽인다!


 

그러나 읽고 싶은 책을 사서 읽는다는 프로세스는 확실히 숨쉬는 것처럼 당연한 면이 있어서 도무지 그만두기가 쉽지 않다. 썩 훌륭한 생활용품, 가령 충전 케이블 같은 게 아주 저렴하게 나온 것을 봤을 때는 잔고를 보고 ‘음, 사봤자 어차피 금방 고장날 걸’ 하고 못 본 척 지나갈 수 있고, 영화까지도 ‘안 보면 뭐 어때. 곧 스트리밍으로 나오겠지.’ 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책만큼은 그렇게 참고 지나가기가 쉽지 않다. 일단 책은 명백히 제각각 다른 물건이라 ‘집에 책이 몇 권인데 또 산다는 거야!’ 하고 스스로 꾸짖을 수도 없고, 관심이 가는 책을 그렇게 넘기면 상당히 심각한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든다. 이런 식으로 지나쳤다가 대단히 긴요한 정보나 지혜, 혹은 빼어난 즐거움을 놓치고 넘어가는 게 아닐까? 따위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요즘은 크라우드 펀딩 같은 방식으로 책이 한정 생산되거나 정식 출간 전에 사는 사람에게만 싸게 살 기회가 주어지는 등의 이벤트가 적지 않아서 아차하는 순간 돈이 나가고 만다. 그렇게 산 책 중에 정말 잘 읽은 게 얼마나 있었는가 하면 할 말이 별로 없긴 하지만(책의 내용을 떠나서 일단 읽질 못한다), 그래도 솔깃한 것이 보이면 퍽 괴로워하면서도 사지 않을 수가 없다. 영화나 게임 속 모험가가 진위도 알 수 없는 낡은 보물 지도를 사는 것과 비슷한 심리다. 어쩌면 엄청난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막연한 희망을 사는 셈이다.


그렇게 보면 책장에 그득히 쌓인 ‘안 읽은 책들’을 빚이 아니라 희망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까? 만사 그렇듯이 생각하기 나름일지도 모른다. 그 저명한 움베르토 에코조차 도서관 못지 않을 정도로 모은 책의 반도 채 읽지 못했다고 하니 내가 감히 쌓아놓은 책이 많다며 불평하는 것도 웃기다 싶기도 하고.


하지만 모자란 책장 문제는 책을 희망으로 본들 절망으로 본들 당연하게도 해결될 턱이 없다. 책장에 책 꽂을 자리가 없어 책을 다른 책 위에 놓기 시작하면 경고등이 켜진 것이나 다름없는데, 내 방의 책장엔 책이 가로로 꽂힌 것도 모자라서 이중으로 꽂힌 곳도 있다. 그런 와중에 안 살 수 없는 전집류를 몇 질 샀더니 책을 바닥에 쌓아놓아야 하나 싶은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생활 환경이 말끔하고 아름답게 유지될 턱이 없다. 결국 나는 눈물을 머금고 책들을 닥치는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읽으라고 주워왔지만 아마도 읽을 수 없을 책 몇 권부터 시작해서 정말 재미있었지만 아마도 다시 읽기 힘들 소설 전집이 우선 정리 대상이 되었고, 소설을 쓸 때 참고하려 한 자료집도 없애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고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도서관이 둘이나 있고, 어떤 책을 당장 펼쳐서 읽어봐야 하는 경우란 거의 존재하지 않으니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처분할 자료 중에서 독립출판물이라 다시 구할 길이 없는 것들은 스마트폰 앱으로 스캔해서 정보만은 남길 수 있었다.


그런저런 각고의 노력 끝에 무너질 듯했던 나의 책장과 절찬리에 비참해질 예정이었던 나의 생활 공간은 간신히 추악하지 않은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책만 늘어나는 게 아니라 신발도 늘어나고 있으므로 숙청 작업도 주기적으로 지속하고 있다. 고칼로리 음식을 많이 먹어대면 운동도 늘릴 수밖에 없듯이, 새 물건을 들이면 헌 물건 중 어떤 것은 내보낼 수밖에 없으니 자연스러운 이치로 받아들일 일이다. 책 속에 새로운 길이나 희망이 있기야 하겠으나 모든 길을 택할 수도 없고 모든 희망을 품을 수도 없다. 말끔한 삶을 추구하기 이전에 포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책장을 볼 때마다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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